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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 60호 박종군 2019년 5월호
 
국가무형문화재 60호 박종군


삶은 대체로 예측 불가능하게 펼쳐지지만 개중엔 타고난 자신의 운명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60호 박종군(56) 장도장이 걸어온 길이 그렇다. 유명한 패도(佩刀) 장인이었던 고 장익성 선생의 후계자로 한평생 광양 장도의 맥을 이었던 고 박용기(1931〜014) 장도장의 외아들인 그는 철들기 전부터 가업을 익히기 시작해 국내 최고의 장도 제작기술을 계승 발전시켜 온 인물이다.


그의 기억 속에서 장도장 부친은 늘 시뻘겋게 달궈진 쇠를 두드려 날을 벼리거나, 완성을 앞둔 칼날 한쪽에 고집스럽게 ‘일편심(一片心)’ 세 글자를 새기던 외골수 장인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광양은 원래 삼국시대부터 철이 많이 났던 곳입니다. 근처 백운산에서 사철과 사금을 구하기 쉬워 ‘패도장’이라 불리는 장도 장인들이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붕어빵 장사를 해 생계를 돕고, 비가 오면 작업장 천정에서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중간에 일을 그만두신 분들과 달리 아버님은 75년을 다른 길에 눈길 한번 주지 않으셨던 분이었어요.”


온 가족이 매달려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 일을 장도장 부친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손에서 놓지 못했다. 끝내는 아들에게까지 고단한 장도장의 길을 대물림했으니 박종군이 순순히 그 힘든 길을 걸어온 것 자체가 운명이란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운명으로 보듬은 장도장의 길을 걷기 시작한 지 어언 40여 년. 그사이 박종군은 2011년 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부친 생전에 나란히 ‘부자 장도장’의 칭호를 받는 진기록을 세우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장도를 만드는 공예기술인은 현재 전국에 예닐곱 명 정도 뿐이다. 그나마 무형문화재 박종군 장도장처럼 섬세하고 기품 있는 전통 장도의 맥을 계승하는 이들은 더더욱 찾기 힘들다. 동국대 불교미술학과를 졸업한 뒤 “기술은 나한테 배우더라도 너는 이론을 더 배워오라”는 부친의 뜻에 따라 대학원에서 ‘한국 도검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쓸 정도로 탄탄한 이론을 갖춘 덕분에 그는 기술과 이론을 모두 겸비한 학구파 장도 장인으로 존경받는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조선미녀 삼총사>, 드라마 <장옥정> 등의 촬영에 쓰인 명품 장도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 “대부분의 전통 공예가 그렇지만 이른바 장도처럼 비인기 공예는 배우겠다는 사람이 없어 맥이 끊어질 판입니다. 다행히 저는 두 아들에게 기술을 전수할 수 있어 한시름 던 셈이지만 요즘은 괜히 아이들에게 큰 짐을 지워준 것 같아 마음이 무겁기도 합니다.”


장도는 한 뼘 정도의 길이에 칼집을 갖춘 작은 칼을 말한다. 누군가를 해할 목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휴대하던 호신용 칼이며, 서민들이 나무를 깎거나 나물을 캐는 데 사용하기도 하던 생활 도구였다. 예물이나 장식용으로 발전해 금, 은, 상아, 나전칠기 등 화려한 장식이 덧대어진 장도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흉내 낼 수 없는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예술로 이어져왔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시집가는 딸에게 일부종사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담은 혼수품으로 인기를 구가하던 장도는 시대가 변하면서 쓰임새가 크게 줄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올곧게 장도의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걸 체계화하고 발전시키는 게 저의 몫이지요. 아버님에게 일을 배울 때 장도 만드는 데 모두 23개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들었는데 제가 본격적으로 이 일을 시작하면서 그 과정을 낱낱이 따져 적어보니 177개 공정으로 세분화되더군요. 칼 한 자루를 만들려면 1만 번 정도의 망치질이 필요합니다. 날이 만들어졌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칼자루와 칼집을 만드는 데도 그 이상의 시간과 정성이 필요해 최소 10년은 배워야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니 잘 가르쳐서 전수해야지요.”


작업실을 겸한 전남 광양시 광양읍 장도박물관은 박용기, 박종군 장도장 부자가 일생을 바쳐 만든 장도 작품들을 전시해놓은 국내 유일의 장도 전문박물관이다. 공방이 있던 땅과 평생 만들어온 장도 작품들을 기부채납하는 조건으로 지난 2007년 시와 정부 지원금을 받아 마련한 건물이다.


그에겐 단지 운영권만 보장될 뿐이지만 전통공예의 아름다움을 알릴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장도 전문박물관에 거는 그의 기대는 절박함에 더 닿아 있다. 현재 이곳은 공구 전시장과 제작공방, 방문객을 위한 체험학습 공간이 마련돼 연간 3만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는 문화탐방 코스로 활용 중이다.


금, 은, 옥, 상아, 비취, 밀화, 수정, 금강석, 나전칠기, 황동, 물소뿔, 오죽, 대추 나무, 회양목 등 온갖 전통 재료로 품격을 높인 전통 장도는 서늘한 아름다움과 도검류 특유의 황홀한 자태로 관람객을 매혹시킨다.


하지만 요즘도 그는 타들어가는 속을 혼자 달래야 할 일들이 많아 시름이 깊다. 정상적인 작품 활동은 고사하고, 박물관 운영도 힘든 구조 때문이다. 결혼 후부터 장도 만드는 일을 거들어온 아내(정윤숙, 55)까지 일가족 모두 이 일에 매달려 있지만 장도 판매, 체험학습으로 얻어지는 수익은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


다달이 받는 170여 만 원의 무형문화재 전승 지원금만으로는 재료 구입비도 대기 힘든 실정이라 그는 요즘 본업인 장도 제작보다 운영비 마련에 더 골머리를 앓는 중이다.


“대한민국의 전통문화는 부익부 빈익빈이 심각합니다. 공연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일부 종목은 돈 문제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갈등까지 생길 정도로 관심이 쏟아지는 반면, 장도 같은 비인기 종목은 생계를 위협받을 지경이에요. 실제로 몇 십 년 동안 배운 기술을 포기하고 살길을 찾아 떠나는 장인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 장도만으로는 생업을 이어가기 힘들어 칠보공예품을 만들어 근근이 박물관을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이 일을 물려주는 게 옳은 일인지 고민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얼굴에 드리운 수심이 가시지 않는 이유를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하루하루 혼신의 힘을 다해 작품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지금, 국내 유일의 장도 무형문화재는 1년 평균 다섯 자루 미만의 장도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장도처럼 정부지원이 절실한 기능 종목에 대한 예산이 현실화되지 않는다면 언젠가 전통공예의 맥이 끊길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진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지난해부터 그는 제17대 국가무형문화재기능보존협회 이사장 직을 맡아 어떻게 하면 존폐 위기에 놓인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활로를 열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고 있다. 임기 중에 무형문화재 기능전수자들의 작품을 전시 판매하는 공간을 더 확충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은 서울에 올라와야 하는 강행군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인 전통문화가 사라져가는 걸 손놓고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문화재청과 협의해 전통공예 진흥을 위한 방법들을 모색하고, 한국 전통공예의 아름다움을 해외에 널리 알리는 것이 시급합니다. 2008년, 2010년 프랑스 파리국제박람회에 출품했을 때 한국 장도에 찬사를 보내던 외국인들을 떠올리면서 이렇게 포기할 수 없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 끝까지 노력해봐야지요.”


허허롭게 웃으며 말끝을 여미는 그에게 왜 하필 당신이어야 하는지를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보다 편한 길을 놔두고 외롭고 고단한 길을 자청하는 어느 누군가의 불가해한 인생이 세상을 한 뼘쯤 더 아름답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언제쯤 그는 편한 마음으로 작업장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우리는 언제까지나 지친 거인의 그림자를 구경꾼처럼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인가.




글 이종원 편집장 | 사진 최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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