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궁리
행복일기
샘터시조
 

 

Home > 월간샘터 > 이달의샘터
이달에 만난 사람
준비된 배우에게 주어진 기적의 선물 2019년 9월호
 
준비된 배우에게 주어진 기적의 선물

 

‘1020 세대와 공감하고 싶다면 웹드라마부터 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웹드라마 열풍이 거세다. TV가 아닌 PC나 스마트폰으로 시청하는 형태의 웹드라마는 유명배우가 출연하지 않음에도 신드롬을 일으키는 작품들이 많다. 그 인기의 중심엔 개성 넘치는 연기로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신예 배우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얼마 전 흥행 돌풍을 일으켰던 TV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눈도장을 찍으며 유명해진 예서 역의 김혜윤과 기준 역의 조병규도 이미 웹드라마 <전지적 짝사랑 시점>과 <음주가무>에서 각각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인지도를 높인 배우였다. 그리고 여기, 웹드라마가 낳은 또 한 명의 스타 배우가 있다. <연애플레이리스트(이하 연플리)>에서 남자주인공으로 분하며 웹드라마 열풍의 주역으로 떠오른 김형석(29)이다.


2017년 시즌1을 시작으로 얼마 전 방영한 시즌4까지 누적 조회수 4억 뷰를 달성하며 웹드라마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연플리에서 그는 순수함을 간직한 대학생 이현승 역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여자친구를 향한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설렘을 안겨주다가도 장난기 넘치는 말투와 표정으로 웃음을 유발하며 그가 연기하는 이현승은 주변에 꼭 한 명쯤 있을 법한 캐릭터여서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다. 화려한 액션이나 진한 멜로연기 대신 현실감 넘치는 일상 연기로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연플리를 시청한 네티즌들은 금세 그의 팬이 되었다. 대중의 큰 사랑을 받으며 무려 3년간 국내 대표 웹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열연 중인 지금의 상황이 그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라고 전한다.


 

“연플리는 무명 배우였던 저를 알려준 작품이에요. 사실 김형석이라는 제 이름보다 현승이로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아질수록 웹드라마 전문 배우라는 낙인이 찍히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지만 더 실력 있는 배우가 되는 건 제 몫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우려를 차치하고 연플리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감사한 작품으로 남을 것 같아요.”


무명배우에서 인기배우로 떠오른 기쁨을 만끽하기 전에 감사한 마음을 앞세우는 겸손한 배우. 누군가는 아직 비주류 장르로 여길지도 모르는 웹드라마가 인생의 가장 소중한 작품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이 그는 새삼낯설게 느껴진다. 열아홉 살에 대형 연예기획사에서 아이돌 연습생으로 데뷔를 준비하다 연기자로 꿈을 바꿨을 때만 해도 그가 그리는 미래는 톱스타의 화려한 삶이었다. 배우보다 연예인이 되고 싶은 바람에 대학도 연극영화과가 아닌 방송연예과에 진학했지만 2년 후 다른 학교의 연기학과로 편입해 체계적으로 연기를 공부하게 되었다.


 

드라마의 배역을 맡게 된 그는 비록 조연이지만 많은 사람에게 존재감을 알리며 화려하게 데뷔할 생각에 한없이 설렜다. 하지만 꿈에 다가서기까지 불과 한 걸음을 남겨뒀던 그때, 운명의 장난처럼 예기치 못한 불행이 닥치고 말았다. 첫 촬영을 앞두고 그만 친구들과 동승했던 자동차가 사고를 당한 것. 의사가 살아있는 게 기적이라고 했을 만큼 컸던 그날의 교통사고는 스물세 살 청년의 창창한 미래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오른쪽 눈뼈가 함몰되고 갈비뼈 여덟 개가 부러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어 그토록 바래왔던 데뷔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병상에 누워 절망감에 빠져 지낸 시간이 자그마치 1년이었다.


“안 되는데 하는 생각뿐이었어요. 연기를 놓게 되면 안 되는데, 치료가 오래 걸리면 안 되는데, 부모님을 이렇게 마음 아프게 하면 안 되는데…. 완치가 어려워 평생 한쪽 눈으로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진단을 받았거든요. 꿈 한번 못 펼치고 이렇게 주저앉는구나 싶어 상실감이 컸죠.”


 

절망적인 진단에도 불구하고 천만다행으로 인공으로 눈 뼈를 맞추는 대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그는 기적처럼 건강을 회복했다. 새로운 인생을 선물 받은 듯 가슴이 벅차오른 순간이었다. 오랜 병상 생활로 자연스레 소속사와의 계약이 파기되어 연기자의 꿈은 요원해졌지만 꿈을 이룰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다시 가슴이 뛰었다. 새로운 희망을 품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홀로 오디션을 보러 다니면서도 즐겁기만 했다. 대학생들의 실습용 단편영화, 출연료가 아예 없는 저예산 독립영화, 무명가수의 뮤직비디오 등 불러주는 곳은 작은 규모의 작품들이었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연기했다. 그렇게 그는 3년 동안 스무 편에 이르는 작품에 출연하며 연기의 초석을 갈고닦았다.


“작은 작품들이었지만 배울 게 많았어요. 표정 연기가 잘 드러나는 얼굴 각도라던가 상대 배우와 호흡을 맞추는 법 등 많은 것들을 습득했어요. 사고 전에도 현실적인 멜로연기에서만큼은 1등이 돼야겠다 생각했었는데 그땐 빨리 데뷔해 유명해지고 싶은 욕심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원래 계획대로 데뷔했으면 오히려 준비되지 않은 배우로 대중 앞에 섰을 거예요. 갑자기 닥친 불행이 오히려 준비 시간을 마련해 주었네요.”


위기를 딛고 더 나은 배우가 되기 위한 실력을 갖추게 된 그에게 또 한 번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연플리 오디션 소식이었다. 주로 일상적인 소재를 다루는 웹드라마가 현실적인 캐릭터를 연기하기에 최적의 장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디션 소식을 들었을 때의 느낌은 4년 전 포기해야 했던 기회가 다시 찾아온 것 같은 기분이지 않았을까. 오디션에서 “오빠는 내가 왜 좋아?”라는 대사에 “왜 좋긴. 예뻐서 좋지”라는 대답을 진지한 말투로 하는 다른 지원자들과 달리 장난스럽게 연기하며 현실감을 살린 덕분에 그는 솔직담백한 이현승 역에 발탁되는 행운을 안았다.


 

 

 

무명시절을 지나 연플리의 현승이로 많은 사랑을 받은 지 어느덧 3년째에 접어든 지금도 그는 항상 배우려는 자세로 카메라 앞에 선다.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다고 여기는 겸손한 신인 배우이지만 연플리에 출연하며 갖게 된 연기철학만큼은 베테랑 못지않게 확고하다. “시즌3에서 제 분량이 많아 완벽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어느 때보다 열심히 준비했는데 오히려 만족스럽지 않은 연기가 나오더라고요. 그때 연기라는 건 정답이 없어서 끊임없이 역량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죠.”


최근 연극 <그릇 찾으러 왔습니다> 무대에 선 것도 배우려는 이유가 컸다. 사실 그에게 연극은 차곡차곡 연기 내공을 쌓은 뒤에 서고 싶은 무대였다. 그러나 연플리에서 감정을 절제해 담백한 연기를 펼치다보니 보는 사람에게 감정이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낀 후로 연극에 과감히 도전했다. 풍부한 표정과 목소리 연기를 필요로 하는 연극이라면 감정의 폭을 넓히는 법을 익힐 수 있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그에게서 훗날 연기력으로 인정받는 톱 배우의 모습이 엿보인다.


앞으로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갈 일만 남은 신예 스타는 어떤 위치에 서더라도 초심을 잃지 않을 거라 다짐한다. 자신의 분야에 임하는 각오로 초심을 강조하는 건 어쩐지 여느 신인 배우와 다름없는 당연한 태도로 비춰진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초심의 의미를 알게 되는 순간, 예사롭지 않은 배우로 보이기 시작한다. 삶에서 조금 일찍 찾아온 고난이 다른 배우와 차별화되는 비범한 마음가짐을 선물해준 셈이다.


“제게 초심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해도 좌절하지 않을 자신감이에요. 큰 위기 속에서 깨달은 건 사람은 언제라도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살면서 또, 뜻하지 않게 원점에 놓이더라도 다시 도약할 수 있는 내공 깊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 지금부터 만반의 준비를 다하려고 해요.”




글 한재원 기자 | 사진 최순호

 
[다음글] ‘공정한 악당’이 되길 자청한 그라운드의 중재자
[이전글] 사진작가 조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