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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 : 손바닥 안의 우주
지은이 : 마티유 리카르, 트린 주안 투안   옮긴이 : 이용철    
분류 : 국내 | 단행본 | 인문.교양
책정보 : 변형46배판, 400쪽
출간일 : 2003-08-01   가격 : 18,000원
ISBN : 89-464-1391-3    
도서구입 : 교보문고 / YES24 / 인터파크 / 알라딘

■ 책 소개

불교와 과학이 만나다!
공통분모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분야가 대화를 시작했다. 이 대화를 통해 과학은 불교가 관념적이며 비실재적이라는 오해를 풀어가게 되었으며, 불교는 과학이 직면한 모순들과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게 되었다.
승려와 물리학자는 이 책에서 시간과 공간,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우주와 쿼크의 세계, 우주의 탄생과 영원한 순환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의식과 지식, 아름다움과 정의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현상의 세계, 즉 물질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방법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찾을 수 있다. 또한 물질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는 결국 서로 확연하게 나누어질 수 없으며, 두 분야의 연관성과 서로에 대한 이해만이 궁극적인 진리에 이를 수 있는 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곧 ‘실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분’만으로 ‘전체’를 알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과학’이 곧 ‘진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대 과학은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왔던 ‘확고부동한 실재’가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과학자들이 품을 수밖에 없는 의문들에 불교는 명쾌한 대답을 제시한다. 모든 것이 변화하고,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은 세계에서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이 책 안에 있는 것이다.



■ 내용 소개

1. 교차로에서
과학과 불교가 서로 대화를 나눌 이유가 있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식의 지식이 각기 추구하는 목적을 정의해야 하며, 또 불교(혹은 일반적인 견지에서의 구도)가 의미 있는 방식으로, 특히 과학이 공백으로 남겨둔 윤리, 인격적인 변화,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 진정한 정신적 통찰력의 분야에서 과학을 보완할 수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 불교는 현대 물리학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언제나 관심을 보여 왔다. 그런데 실재를 탐구하는 데 과학 또한 불교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2. 존재와 비존재
우주에는 시초가 있는가?
세계의 시초라는 개념은 모든 종교와 과학의 근본적인 관심사이다. 우주는 약 150억 년 전에 시간과 공간과 동시에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빅 뱅 이론은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가장 잘 설명하는 이론이다. 그러나 불교는 이 문제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불교는 최초의 시작이란 개념은 잘못된 것이며, 우리의 세계는 무한히 연속되는 우주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빅뱅은 진정 최초의 폭발인가, 아니면 헤아릴 수도 없는 무수한 우주들이 시작도 끝도 없이 잇달아 생겨나는 가운데 나타나는 한 특정한 우주의 시작인가? 시간과 우주의 시초라는 개념은 어쩌면 근본적으로 무효화된 것이 아닌가?

3. 위대한 창조자를 찾아서
조직 원리는 존재하는가?
우주의 놀랄 만한 조화와 정확성에 대해 생각할 때, 전지한 창조자가 있다고 상상하거나 비종교적인 관점에서 우주의 진화과정을 완벽하게 조절했을지 모르는 어떤 종류의 창조원리가 존재한다고 상상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러한 창조자의 전능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우주의 기원과 생명이 나타났던 방식에 대해 궁금해 하거나, 생명이 없는 물질이 생명이 있는 물질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창조자인 신이 있는가, 없는가라는 문제는 세계의 위대한 정신적 전통들을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요소가 된다. 불교에서 ‘최초 원인’이라는 개념은 분석을 거치면 의미를 잃어버린다. 어떤 과학자들은 우주가 극도로 정밀하게 조정되는 것이 순전히 우연이라고 주장하면서 신에 대한 필요성을 없애버린다. 그러나 또 어떤 과학자들은 이 세계에서 작동하고 있는 어떤 종류의 조직 원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조직 원리의 개념이 분석을 거친 후에도 유효할 수 있는가? 이것은 필연적이고 논리적인가?

4. 모래알 속의 우주
현상들의 상호의존성과 불가분성(不可分性)
상호의존성이라는 개념은 실재의 본질에 대한 불교적 시각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관한 무한한 함축성을 담고 있다. 이러한 상호의존성이라는 개념은 양자역학에서의 불가분성이라는 개념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이 두 개념은 단순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끔 이끈다. 하나의 ‘사물’ 혹은 하나의 ‘현상’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주의 현상들은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상호 연관되어 있는가? 사물들이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바탕으로 삶에 대한 어떤 결론을 끌어내야 하는가?
5. 실재의 신기루
소립자의 존재에 대하여
소립자의 분석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그리 특별한 영향력을 갖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어째서 불교는 소립자에 관심을 갖는가? 그러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확고부동한 실체를 갖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을 때, 그 기초를 이루는 ‘기초재료’라고 생각되는 것의 본질을 밝히는 것은 중요하다. 불교만 유일하게 현상의 ‘실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코펜하겐 학파에 따르는 양자물리학의 해석 역시 원자들이 ‘사물’이 아니라 ‘가시적인 현상’이라는 생각을 시사한다. 이것은 흥미진진한 논쟁거리이다. 우리가 물질 혹은 ‘객관적 현실’이라는 부르는 것의 한가운데 인간의 마음 혹은 인간의 지각을 문제로 내놓기 때문이다. 물질의 ‘확고부동함’이 의문시될 때, 그 결과 다른 많은 개념적 장벽들이 무너질 것이 틀림없다.

6. 여름 구름 속 번개처럼
실재의 중심에 있는 비영속성
현상의 비영속성은 유용한 삶을 살기 위한 명상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실재를 이해하는 데 본질적인 부분이다. 세계의 근본적인 본질에 대한 우리의 시각과 행동이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우주에 영속적인 실체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우리는 이것을 물어야 한다. 불교의 분석과 물리학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아무 것도 영속적이지 않다면, 이러한 지식은 우리 삶의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하는가?

7. 각자에게는 자신의 현실이 있다
지식의 눈(雪)이 녹을 때
실재의 본질에 대한 양자역학의 근본적인 발견들에도 불구하고, 많은 물리학자들은 계속 ‘유물론적 실재론’을 믿고 있다. 그것은 소립자나 초끈으로 기술될 수 있는 확고부동한 실재가 있다는 견해이다. 한편 양자역학의 철학적 함의(含意)를 해결하려고 더욱 노력하고 있는 또 다른 물리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양자의 모순은 사물의 궁극적 본질이 영원히 베일에 가려진 채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베일에 가려진 실재라는 개념은 유물론적 견해와 실제로 다른 것인가? 불교는 우리가 실재의 진정한 본질을 파악하기 원한다면, 양자물리학이 드러낸 철학적 수수께끼를 훨씬 더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8. 시간의 문제들
현대 과학은 뉴턴의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시간에서 관찰자의 운동과 그가 위치하고 있는 중력장의 세기에 따라 느려지거나 빨라지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적이고 유연한 시간으로 넘어왔다. 시간은 더 이상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의 과거는 또 다른 사람의 미래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물리적 시간과 우리가 체험하는 심리적 시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시간이 한 방향으로만 운동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되는 ‘시간의 화살’은 실재적인가, 아니면 시간의 방향이란 단지 정신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9. 카오스와 조화
원인에서 결과로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그리고 비교적 최근의 과학인 카오스와 복잡성이론이 발견한 연구 성과들로 인해 뉴턴에게서부터 물려받은 인과법칙은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상대성이론은 관찰자의 운동이 사건들의 시간적 연속을 수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양자역학은 물질의 중심에는 불확정성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밝힌다. 카오스와 복잡성이론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종종 결코 선형적(線形的)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연구 성과들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수정된 인과법칙의 개념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 새로운 개념은 어떻게 상호의존성과 전체적 실재에 근거를 둔 상호인과성이라는 불교의 개념과 일치할 수 있는가?

10. 가상의 경계
마음과 육체의 이원성?
의식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러한 현상은 일단 두뇌가 충분히 복잡해지면 진화의 과정을 통해 자연적으로 일어나는가? 아니면 의식은 항상 물질적 우주와 공존해왔는가? 의식은 그 발생을 두뇌에 의존하고 있는가? 아니면 물질적 구현과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가? 마음과 육체의 이원성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의식이 육체와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있다면 이것이 혹시 환생을 설명할 수 있는가?

11. 자신이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로봇?
두뇌는 컴퓨터처럼 작동하는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이 인공지능을 부여받은 로봇들에게서 생겨날 수 있는가? 아니면 이러한 종류의 인공지능을 만들려는 시도는 근본적으로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인가? 삶의 의미와 세계 안에서 차지하는 우리의 위치에 대한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반성적인 인간의 의식이 추구하는 목적이란―만약 그러한 목적이 존재한다면―무엇인가?

12. 대양의 물결처럼
의식의 연속체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의식의 연속체라는 개념이 어떻게 우리의 우주관에 통합되는가? 이러한 연속체는 어떠한 상태 변화를 알 수 있는가? 어떻게 그것을 깨달음―부처의 상태―으로 이끌 수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의 실현에 장애가 되는 정신적 요인들은 어떤 것인가?

13. 우주의 문법
자연 법칙, 수학, 이데아의 세계
자연 법칙은 우주를 지배하는가? 아니면 현상들의 해석, 즉 현상들을 서로 연결하고 그것들의 운동을 예견하는 방식인가?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우리는 자연 법칙이 일상생활의 영역에서 분리된 더욱 고차원적인 실재에 속한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정신이 오로지 통찰의 순간에 지각할 수 있는 플라톤적인 이데아의 세계에 속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정신이 그러한 법칙을 만드는 것인가?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과 선입관에 종속되어 있는가? 상호의존성이라는 불교의 개념은 이러한 난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가?

14. 이성과 명상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과학적 방법의 기초인 논리와 추론적 이성의 한계는 어떤 것인가? 과학은 세계에 대해 던지는 질문들 모두에 대답을 주고 ‘궁극적인 진리’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과학의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접근 방법은 불교의 명상 과학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불교의 명상은 어떻게 발견에 이르며, 그러한 발견을 정말 과학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내성과 주관적 체험에 근거를 두는 명상 과학의 유효성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가?
15. 아름다움은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 안에 있다
과학적 탐구와 그것을 인도하는 이론들 안에 아름다움의 개념이 있는가?
불교에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16. 명상에서 행동으로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 이것이 불교 수행자의 신조가 될 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어떤 차원에서 행동할 것인가? 명상가에게 중요한 문제는 세상에 영향을 주기 전에 어느 정도까지, 또 얼마나 오랫동안 내적 변화의 과정을 따라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즉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전념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인도주의적 활동 영역에서 불교는 충분한 노력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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