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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 : 우연히 만나 새로 사귄 풍경
지은이 : 이지누        
분류 : 국내 | 단행본 | 문학.예술
책정보 : 46변형, 257쪽
출간일 : 2004-04-23   가격 : 12,000원
ISBN : 89-464-1457-X    
도서구입 : 교보문고 / YES24 / 알라딘 / 11번가

과연 우리에게 이런 기행산문이 있었던가?
중세와 근대, 현대를 아우르는 풍경의 수사학, 길의 도道

 

부안에 대한 성실한 사랑의 기록


이 책은 변산과 곰소만 줄포 등 부안이 품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성실하고 섬세한 사랑의 기록이다. 부안이 난데없이 시속時 俗의 중심이 된 소이연과는 별개로, 아주 오래 전부터 부안을 눈여겨보고, 부안의 구석구석을 섬세하게 뒤지고 다닌 사람이 있었다. 그이에겐 부안에 대한 오늘의 이 들끓는 듯 요란한 관심과 주목이 참 마뜩찮아 보일 만도 하다. 왜냐하면 그 천격의 시류 속에서 자칫 부안이 감춰두고 있는 진면목이, 역사의 행간이 감추고 있는 진실이 가려버릴 수도 있음을 그는 진작부터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안을 걱정하고, 그 만큼 부안을 사랑하는 이, 그이가 바로 이지누다.

 

숨은 풍경 찾기 혹은 풍경과의 대화


이지누의 글은 길에 대한 정치한 해부다. 그의 섬세한 발길은 길이 만들어지는 역사의 투박한 옹이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 풍경의 심층과 길의 상처를 걷어낸다.

한기가 스미는, 막 차가와지는 초가을 무렵을 생량머리라고 한다. 이 책의 갈피갈피를 장식하는 이지누의 글과 사진은 마치 이 생량머리의 눈뜸처럼 다가온다. 느릿하고 덥고 혼몽한 열기를 걷어치우는, 자욱한 혼돈의 숲을 갈아엎는 생량머리의 상쾌함은 겸허한 사유와 자유로운 상상을 길로 이끈다. 그 명쾌한 고독, 자기를 들여다보는 저 그윽하고 깊디깊은 투시는 그 어느 누구도 모사하기 힘든 침사沈思를 통해 정갈한 넓이를 확보한다.

이 책 속에서 보이는 이지누의 발걸음은 여행의 호사도 아니고 답사 따위 범박한 실용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자신을 골똘히 들여다보는 자만이 누리는 삶에의 응접이며 수용인 동시에 교통의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하면 이지누의 글은 길에 대한 정치한 해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섬세한 발길은 길이 만들어지는 역사의 투박한 옹이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 풍경의 심층과 길의 상처를 걷어낸다.


이지누는 책의 머리말에서 풍경과 만나는 그 미세한 마음의 떨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언젠가 산길을 걷다가 바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람, 그 자체로서 그를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길섶에 우뚝 선 나뭇잎이 살랑대거나 목이 긴 원추리가 흔들거리는 것을 통해 비로소 바람을 보았던 것이지요. 땀으로 젖은 내 살갗에 바람이 닿았을 때 이윽고 그가 바람이 되었듯이 사람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나 이외의 또 다른 사람이 있어야만 그제야 나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겠지요. 그 탓에 길을 걷다가 만나는 자연의 모든 것 또한 반가운 것이지만 불쑥 만나는 사람도 그에 못지않은 기쁨이지요.”


책의 구성 및 내용 소개 - 텍스트 속으로


이지누가 변산을 중심으로 전라북도 부안 일대를 퍼즐 나누듯이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눠 샅샅이 탐문한 기록인 이 책에는 부안의 어제와 오늘이 담겨 있고, 부안의 앞과 뒤가 놓여 있으며, 부안의 왼쪽과 오른쪽이 빠짐없이 담겨 있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지금껏 이 땅의 그 어떤 사람도 해보지 못한 값진 의미를 지닌다. 그 어느 향토사학자도, 지리학자도 풍수학자도 해보지 않은 처녀의 실험인 것이다. 이 책이 갖는 모뉴멘탈한 의미는 부인할 수 없이, 부안에 대한, 풍경에 대한 이지누의 순연한 사랑으로부터 출발한다.

 

총 15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크게 나누면, 부안 일대의 풍경에 반응하고 그 풍경과 조곤히 사귀는 작가 내면의 은밀한 기록에 해당하는 전반부와 자신보다 앞서 부안의 풍경을 바라보고 풍경과 교감을 나눴던 선인들의 발자취를 반추하면서 풍경에 얽힌 역사의 행간읽기를 시도하는 후반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특히 후반부는 불가의 선사들이 곳곳에 남긴 자취와 말씀에 대한 통찰로 가득하다. 그를 위해 그는 옛 서가를 뒤져 문헌들을 찾아서, 밤을 새워 해독해나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1장 우연히 만나 새로 사귄 풍경(곰소염전)


“가도 가도 끝이 없이 이어지던 퇴락하여 옹색한 풍경들, 그곳을 걸으며 무던히도 애 쓴 것은 곧이곧대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한 치의 틀림도 없이 바늘 끝을 곧추세워 그들을 보노라면 때로 풍경 속으로 나 자신의 모습이 덧씌워지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내가 보이기 시작하면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춘 채 서둘러 그들을 등지며 기대서곤 했지만, 차마 바로 볼 수 없어 등을 돌리고 돌아 선 그곳 또한 백척간두 송곳 끝이기는 매 한가지였으며 어김없이 그곳에도 내가 있었습니다.”

 

2장 바다로 향한 문을 닫은 풍경(줄포)


“위도의 시도리에 있는 늙은 살구나무에 꽃이 흐드러지고, 변산반도의 배꽃이 비가 되어 내리고, 주린 배를 부여잡고 그 아득했던 보릿고개를 넘다가 지칠 즈음 만선을 꿈꾸던 조깃배들이 앞 다투어 모였다간 흩어지던 곳, 그곳은 나라 안에서 손꼽히는 항구였습니다. 가을이면 고부들판 기름진 쌀이 산으로 쌓였다 떠나고, 정미소 발동기 소리가 그치지 않던 곳, 코밑이 거뭇해진 아이들조차 너끈히 들어가고도 남을 큰 옹기가 포구에 가득하고 그 안에는 툭툭 소금 뿌려서 재우던 칠산바다 조기가 얌전히 누워 있던 곳. 일년 내내 말 울음소리 그치지 않던 그 작은 줄포는 포구였습니다. 드디어 만선 깃발 드높이 펄럭이며 칠산바다에서 돌아온 남정네들이 웃음과 눈물로 질펀한 에로티시즘을 마음껏 바다로 돌려보내던 줄포, 그곳은 선창이었답니다.”

 

5장 당혹스러운 중년의 바다(해창갯벌)


바다로 가던 길, 수평선쯤에 아득하게 작은 섬이 보였습니다. 소년은 “고래다”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기차를 타고 있던 사람들은 웃음보가 터진 듯 배꼽을 잡았지요. 하지만 소년은 그 섬에서 고래가 물을 뿜듯 한줄기 물이 분수처럼 솟아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산에 바다가 가릴 때까지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했던 까닭은 진정 고래가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몇 개의 산을 지나치고 굴속을 빠져나왔지만 고래를 보고 싶던 기대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득시글거리는 사람 말고는 영화에서 봤던 그 어떤 것도 바다에서 볼 수 없었던 그해 여름은 그다지 신이 나지 않았습니다. 다음해도 그 다음해도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바다는, 아니 고래는 내 작은 책상서랍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6장 길을 잃어 쓸쓸하다면 해 저무는 모항으로 가십시오(모항)


이중선의 애잔한 「추월만정」은 넘실거리는 파도를 타고 넘고, 그니의 언니인 이화중선의 애끓는 「이별가」는 북을 매기던 남동생의 추임새를 타고 갑남산 등허리의 부엉바위 당집 근처를 서성이곤 했습니다. 굵은 빗줄기가 폭포가 되어 산이 우는 밤이면 용왕제 모시던 늙은 팽나무 곁을 지나 스멀스멀 바다로 걸어가던 계면조, 그가 육자배기토리로 인천 강을 따라 질마재를 넘었다가 고창 선운사 붉은 동백꽃이 되어 돌아오던 띠목마을은 갯바람에 띠풀이 넘실대던 모항茅項입니다.

 

11장 오줌이나 눠야겠습니다(내소사)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탓에 더욱 그리운 사람. 그는 글귀 하나로 저에게로 왔습니다. 스님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로 말입니다. 내소사로 가는 길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솟아 있는 때문이 아니라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의 고결함 때문이겠지요. 그는 의당 선사禪師라 불려야 마땅하지만 그저 범부凡夫로 족했으니 그리울 수밖에요. 해안범부지비海眼凡夫之碑. 부도 밭에 우뚝 솟은 비석의 글씨가 한눈에 택성宅成 탄허呑虛 스님이 쓴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지만 글씨의 호쾌함보다는 범부의 비가 내소사 부도 밭에 우뚝한 것이 통쾌한 것을요. 당나라의 방온 거사가 범부 부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 모두 오르지 않았다면 내려오지 못했을 테지요.”

 

12장 몸도 잊은 채, 마음도 잊은 듯 걷던 길(청련암)


“누군가 묻습니다. 무엇을 보았느냐問我何聊見고 말입니다. 답합니다. 보는 것도 잊은 듯, 듣는 것도 잊은 듯 걸었을 뿐인데 무엇을 듣고 또 무엇을 보았겠느냐고 말입니다. 대밭은 그대로일 뿐 그곳에 바람이 지나가면 소리만 남고 티 없이 맑은 하늘에는 소리도 없이 조각구름만 흘러가던 것을요. 착십마급着什磨及이라 했습니다. 급하지 않게 다니다 보면 시절인연이 닿는 곳 어디에선가 불쑥 만날 수 있겠지요. 공부방으로 돌아오는 길, 작당 마을을 지나고 모항을 지나 바람모퉁이를 돌아드는데 하늘이 붉어졌습니다.”

 

15장 이윽고 눈물 뚝뚝 떨어지는 날 다시 뵙겠습니다(불사의방)


“훌쩍 아름다운 숲길을 지나 원효방으로 올랐습니다. 도무지 길이 없을 것처럼 보이는 바위 앞에 다다라 찬찬히 훑어보니 곧추 선 벼랑의 허리쯤에 발 하나를 올려놓으면 딱 맞을 길이 바위 위로 나 있습니다. 너댓 발짝, 조심스레 바위를 껴안으며 구비를 에돌았습니다. 아! 그곳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은 곳에 웅장한 원효방, 그가 길손을 맞이합니다. 먹먹한 가슴으로 그를 바라봤습니다. 무애無碍에 젖어 거침이 없던 소성거사 원효가 머물렀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지만 내다보이는 풍경 또한 거침이 없습니다. 석굴 안 감실에는 금강삼매金剛三昧에 젖어든 부처님이 어서 오라며 염화미소 베풀어주시고 원효 당시부터 마르지 않았다는 젖샘에서 방울방울 불유佛乳가 떨어지니 저는 다만 차 한 잔 마셔야겠습니다.”

 

사진들


 

 

이 책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이지누의 글뿐만이 아니다. 사진가로서도 뚜렷한 개성과 입지를 갖고 있는 이지누의 고감도 사진들은 부안의 어제와 오늘의 모습을 실제적으로 입체감 있게 보여준다. 이 책에 수록된 사진들은 이지누가 부안 일대에서 찍은 수백 장의 사진 중에서 신중하게 가려 뽑은 것들만을 모은 것이다. 그의 어떤 사진은 마치 200년 전의 빛과 향기를 내뿜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사진은 바로 등 뒤에서 물 흐르는 소리를 내고 있는 듯한 현실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환상과 현실 사이의 아스라한 경계에서 혼연의 관심과 사랑으로 겨우 길어 올린 사진들. 그것은 바로 찰나이면서 영원한 풍경의 기록이다.

 

이지누의 우리땅밟기는 이 책 <우연히 만나 새로 사귄 풍경>을 시작으로 도시나 우리땅 곳곳에서 만났던 퇴락한 풍경들과 나눈 대화인 <우연히 만나 오래 머문 풍경>, 길에서 우연히 만났던 사람들과의 이야기인 <우연히 만나 오래 사귄 사람>, 길을 떠나 발길 닿는 곳 마다 펼쳐진 불교문화유적을 새롭게 조망하는 <우연히 만나 잊지 못하는 부처>, 길 위에서 뜻하지 않게 만난 들꽃이나 사소한 사물들과의 대화인 <우연히 받아 더욱 귀한 선물> 등을 연이어 펴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