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처음을 만들고 처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첫눈, 첫걸음, 첫길, 첫사랑, 첫술, 첫여름, 첫인상, 첫출발. 순정하게 지키고 싶은 어떤 시작에 우리는 늘 ‘첫’이라는 관형사를 붙인다. 맨 처음 피아노 위에 손가락을 얹을 때 내 머릿속엔 맑은 물이 튀는 게 보였다. 맨 처음 보조 바퀴 없이 자전거를 탔을 때 뒤편에선 아버지가 손을 흔들고,...
겨울밤의 감감함에 익숙해질 무렵, 새해가 온다. 새해 첫날이 겨울의 복판인 까닭은 무엇일까. 봄이 올 무렵이었으면 어땠을까. 초여름 어느 날이었다면. 단풍 물드는 가을이나 겨울의 시작점이었으면 이상했을까. 까마득히 먼 옛날, 세상의 첫 새해 첫날을 상상해본다. 그날의 의미는 아무도 몰랐으리라. 그러니 기쁨도 회한도 다짐도 없었으리라. 그러니 특별하지도 않았겠지. 여느 하루...
스케이트를 생각하면 간질간질한 이야기 몇 가지가 떠오른다. 첫째로는 헤르만 헤세의 수필에서 읽은 것. 그는 짝사랑하는 여자애의 손을 잡고 꽁꽁 언 호수 위에서 단둘이 스케이트를 탔던 어린 날을 눈부시게 회고한다. 추위의 낭만적인 쓸모를 상기하고 싶을 때 꼭 찾아 읽는 글이다. 영화 〈세렌디피티〉에서도 스케이트는 낭만의 정점을 뒷받침하는 장치로 활약한다. 우연히 만나 한눈에...
언제부턴가 나는 새해를 맞이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거창한 한 해 계획을 세우지도, 원대한 소망을 품지도 않았다. 새해라고 달라질 게 뭐 있나. 부풀면 날아오를 줄 알았지. 부풀다 쪼그라든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더 이상 낙담하고 싶지 않았다. 기대도 실망도 없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주름진 마음을 나는 그렇게 한동안 내버려뒀었다. ‘처음’이라는 무구한 감각 때문이었을...
라오스 루앙프라방 수파누봉 국립대학교 한국어학과 학생들과 함께. 1월이 되면 사람들은 마음이 바빠진다. 새로운 목표와 다짐을 실천하며 뜻깊게 한 해를 시작하려 한다. 하지만 음력 설을 쇠는 풍습이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1월 1일보다 설날을 진짜 새해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현재 내가 지내는 라오스에서는 이보다 더 늦은 4월을 진정한 새해의 시작으로 여긴다. 불교식 달력에 따...
2017년 1월, 아침 일찍 기차에 올랐다. 부장으로 승진하면 1년 동안 지방 근무를 해야 하는 회사 관행에 따라 포항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그토록 원했던 승진이건만 막상 열차에 오르니 고민이 많아졌다. 부서를 잘 이끌어갈 수 있을지, 함께 일할 팀원들과 원활히 합심할 수 있을지 생각할수록 어깨가 무거워졌다. 그 순간, 얼마 전에 신문에서 읽은 문유석 판사의 ‘전국의 부장...
물이 저절로 땅속에서 솟아 나오는 곳, ‘샘’은 삶에서 꼭 필요하다. 시련과 고난으로 타는 갈증이 느껴질 때 들이켜는 샘물을 어떤 금은보화에 비할까. 삶의 여정과 꼭 닮은 험난한 등반길에서 만난 귀한 생명수는 월간 《샘터》가 지닌 가치나 진배없다. 여행의 추억은 대체로 머릿속에 저장되지만 히말라야 등반 같은 극한의 경험은 몸에 새겨진다。 극지에서 느끼는 감정은 워낙 강렬해서...
시각장애인들에게 제주도는 비교적 쉽게 접근 가능한 국내 여행지다. 사람들은 먼 곳으로 떠나기로 결심하면 비행기 티켓부터 예매하지만 난 항공권을 예약하기 전에 제주시 시각장애인 연합회의 차량 예약 상황부터 문의한다. 내가 계획한 일정과 차량 예약 스케줄이 맞으면 그다음에 항공편을 예약하고 숙소를 선택한다. 제주공항에 도착하면 예약한 차량이 마중을 나와있다. 기사님들은 제주도...
〈작은 아씨들〉의 조에게 조, 마지막 편지를 씁니다. 당신을 끝으로 이 편지도 막을 내리게 되었어요. 지금껏 걸어온 시간을 찬찬히 돌아보고 그 시간의 의미를 발견하기에 당신은 참 좋은 수신인이 되어주네요. 영화 작은 아씨들도 사랑으로 충만했던 한 시절과 작별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니까요. 영화에는 네 자매가 등장합니다. 성격도 외양도 조금씩 다른 자매들은 각기 다른 삶의 지향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첫째인 메그는 배우를 꿈꿨지만 이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안온한 가정을 꾸리기로 결심합니다. 둘째인 당신은 그런 언니의 삶을 응원하면서도 언니가 자신의 꿈을 너무 쉽게 저버린 것 같아 안타까워하...
하얀 것들을 좋아한다. 수십 장의 여린 꽃잎으로 순결을 다짐하는 흰 작약, 앙상한 가지와 줄기만으로 충분히 빛을 발하는 자작나무, 소리 없이 세상을 감싸 안는 눈송이들…. 추위에 약하지만 시린 계절을 반기는 이유는 하늘에서 내리는 보석 때문이다. 미국에 터전을 마련한 뒤 처음 맞이한 겨울에도 눈부신 설원이 펼쳐졌다. 미국 남부의 겨울은 온화한 편이라 눈(雪)과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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