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전부터 해외 봉사활동을 꿈꿨다. 외국에 나가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결심은 직장생활을 하게 된 직후부터 생겼다. 1990년, 농촌 개발과 농업인 교육을 지원하는 농업기술센터에서 근무를 시작했을 때 나는 특별한 물건을 발견했다. 당시 사용하던 환등기, 스크린 등의 교육 기자재에 ‘이 물품은 유니세프로부터 지원받은 물품입니다’라고 적힌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그걸 보면서 우...
도서관에서 옛 친구를 보았다.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옆모습을 내가 잊을 리 없다. 아마도 그녀일 것이다. 초여름 바람을 맞으며 도서관에 들어갔다. 책을 검색하는 PC쪽으로 걸어가다 발걸음을 멈췄다. 청바지에 연한 감색 리넨 셔츠를 입은 단발의 여성이 가벼운 백팩을 메고 모니터를 바라보는 중이다.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20년 전의 기억이 스쳤다. 그 시절 마로니에...
요즘 잘 듣지 않는 노래는 한때 가장 사랑했던 노래일 수 있다. 한 시절이 끝나면 당시 즐겨듣던 노래도 함께 끝난다. 8년 전 R이 런던에 살 때 나는 종종 그녀를 보러 갔다. 주로 겨울이었고, 그녀가 퇴근하고 돌아온 밤이면 창문에 기대어 노래를 들으며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를 막막해하곤 했다. 그때 듣던 노래 중 90년대 록밴드 ‘블러(Blur)’의 팝송도 있었다. 오직 블...
고백하건대, 나는 빵 맛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대체 무슨 맛으로 먹지. 그나마 속에 소시지나 팥소가 들어있거나 잼이라도 곁들인다면 모를까. 네가 맛난 빵을 먹어본 적 없어서 그래. 가까운 이들은 내게 진짜 빵 맛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했다. 더러 내 손을 붙들고 유명 빵집으로 이끌기도 했다. 고마운 일이지만 그들이 골라주는 온갖 종류의 빵 중에서 그럭저럭 입맛에 맞는 빵조차 ...
12년 전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를 출간하자 많은 곳에서 강연 요청이 쏟아졌다. 정신과 전문의가 환자를 돌보며 깨달은 인생 진리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준 덕분이었다. 수많은 청중과 인생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참으로 뜻깊었는데 그중에서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순간이 있다. 지방에 있는 한 교육기관에서 강연하던 날이었다. 현장에 도착해 건물 주변을 둘러...
〈해피엔드〉의 다섯 친구들에게 날이 무척 더워졌네요. 계절의 경계선을 명확히 그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봄은 어디서 끝나고 여름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나 세상을 향해 질문을 건네게 돼요. 더불어 ‘나만의 계절 명명법’을 발견하고 싶어집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에요. 저는 여름만 되면 생각나는 시가 한 편 있는데요. 무심하게 하루하루를 살다가도 불현듯 ‘레몬향이 거미줄처럼 엉킨...
작년 가을, 스위스 비엔(Bienne)으로 가는 2차선 도로에서 나는 한숨을 쉬며 렌터카의 핸들을 돌렸다. 길 오른편에 있는 중고품 가게를 본 뒤였다. 처음에는 ‘이제 저런 곳에는 그만 가도 되잖아’라는 생각 때문에 가게를 보고도 지나쳤다. 하지만 룸미러 뒤로 점점 멀어지는 가게를 보며 마음이 바뀌었다. ‘평생 저 가게에 가볼 기회가 없을 텐데 이대로 지나치면 후회하지 않을...
그곳에 갈 때면 이 세상에 없는 계절로 초대받는 기분이다. 초록 더께가 여울진 아름드리나무 터널로 밀물처럼 스미는 따사로운 햇살, 숱한 세월에 빛바랜 벽돌집들이 추억을 더듬는 한갓진 골목에 부는 남실바람, 문턱이 닳도록 정겨운 소식을 실어 나른 우체국에 진동하는 그리움의 향내, 그리고 이 모든 걸 평온하게 감싸는 너른 들판. 그 영원의 풍경 속에 나만의 작은 천국이 있다. ...
‘민트초코’를 좋아하는 사람을 미각이 망가진 변태로 몰아가는 광풍이 온라인을 휩쓸던 시절이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중립이었던 나는 죄없이 과하게 두들겨 맞는 민트초코가 불쌍해서 ‘민초단’을 다짜고짜 자처했다. 코를 막고 인상을 쓰며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의 반응에 괜한 반감이 들어 생전 먹지도 않는 취두부의 애호가가 되기로 결심한 적도 있었다. 두리안은 또 어땠나. ‘천국의 ...
“어른도 읽을 수 있는 그림책이야.” 작년 이맘때, 지인이 책 한 권을 건네며 해준 말에서 ‘그림책’이라는 단어가 마음속에 콕 박혔다. 그림책이라니, 어린 시절 이후로 잊고 지낸 단어였다. 선물 받은 그림책을 펼쳐보았다. 넓은 여백을 보는 순간 숨통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하루에 한 권씩 그림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림과 글을 훑기만 했다. 그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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