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직을 하고 60대 중반에 이르러 일상의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등산이 유일한 취미였던 지라 체력적인 변화를 가장 크게 느꼈다. 은퇴하기 전에는 힘든 줄 모르고 주말마다 산에 올랐는데 어림도 없었다. 1,000m 높이의 봉우리를 거뜬히 오르내리던 체력은 다 어디로 갔는지 500m를 오르는 것도 버거워졌다. 어쩌다 등산 한번 하면 3일 정도는 푹 쉬어야 할 정도로 약해진 ...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나는 ‘연애 병사’로 군 시절을 보냈다. 고참들의 연애편지를 대필해주는 전무후무한 보직이 군대에서의 내 역할이었다. 자대 배치 후 최고 선임이 애인에게 편지를 대신 써줄 사람을 찾는다는 얘길 들었다. 중학교 때 백일장에서 상을 탔던 나는 글쓰기라면 자신 있어 망설임 없이 자원했다. 군 생활이 조금 편해지겠다는 계산이 작용한 탓도 있었다. 그렇게 ...
3년 전 어느 금요일 오후, 그날도 평소처럼 회사업무를 마치고 퇴근하던 길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오니 출구 앞에 젊은 여성 한 명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 어딘가 아파 보였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곁으로 다가가 괜찮은지 물었지만, 대답할 힘조차 없는지 묵묵부답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
사람들은 보통 옷 가게에 옷을 사러 가지만 내 경우는 다르다. 난 노래를 쇼핑하러 옷 가게에 간다. 취향에 맞는 새 곡을 ‘득템’하기에 남다른 감각으로 선곡된 패션브랜드 매장만큼 적합한 곳은 없다. 내가 가장 자주 가는 가게는 대구 시내에 있는 한 스파브랜드 매장이다. 이곳은 비교적 리듬이 빠르고 흔하지 않은 노래들을 재생해서 좋아한다. 옷을 고른 뒤, 세련된 음악을 들으며...
우울증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지 3년이 흘렀다. 가지각색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이 녀석은 최근 ‘불안’이란 탈을 쓰고 나를 괴롭혔다.얼마 전에 이사 온 집은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식 아파트다. 세련된 집이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방음이 잘되지 않는다. 밤에 침대에 누우면 어느 집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생생히 들리고, 윗집에서 걸어 ...
인터넷으로 뉴스나 영상 등을 보고 나서 내가 빼놓지 않고 하는 일이 있다. 바로 댓글창 확인하기다. 때론 원문보다 훨씬 더 유익한 정보를 댓글로 만날 수 있어서 좋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현안에 대해서는 촌철살인을 날려 속을 후련하게 하고, 가벼운 일상 게시물에는 재치 넘치는 문장으로 배꼽을 잡게 하니 묘한 중독성이 있다. 오죽하면 댓글 때문에 온라인 뉴스를 본다는 말이 있...
딩동, 알림 소리와 함께 반가운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둘째 딸의 이름 뒤에 과장이라는 직함이 적힌 공고문 사진과 ‘승진했어’라는 둘째의 한마디가 덧붙었다. 기쁜 소식에 곧바로 전화를걸어 “은우야, 승진 축하해. 엄마 너무 좋다! 승진 턱 내야겠네?” 하고 말했더니 돌아온 아이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축하파티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까지 한 번도 파티 같은 것 ...
다양한 식물이 사는 우리 집 베란다는 마치 작은 숲 같다. 한집에 살아도 각자의 방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은 부모님과 난 종종 베란다에 모여 각자 돌보는 식물을 자랑하며 열띤 수다를 벌인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도 화분만 보면 마음이 사르르 풀어지는 우리 가족은 식물이 전해주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 속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을 무럭무럭 키워간다. 멀리 떨어져 사는 오빠네와도 ...
흔히 ‘콩밥을 먹는다’라고 하면 법을 위반해 교도소에 들어가 죗값을 치르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지은 죄 하나 없이 4년째 하루 세 끼 콩밥을 먹고 있다. 사연은 이렇다. 60대 후반부터 흰머리가 생기더니 어느샌가 탈모가 급격히 진행됐다. 흰머리는 한 달에 두 번의 염색으로 어느 정도 감출 수 있었으나 머리를 감을 때마다 한 움큼씩 빠지는 머리카락은 방도가 없었다....
아내가 또 밥을 태웠다. 달포 동안 벌써 세 번째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매캐한 냄새와 연기가 코를 찔렀다. 재빨리 가스레인지를 잠그고 창문을 열어젖혔다. 내가 조금만 늦게 들어왔으면 어땠을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 사람은 밥을 안쳐놓고 어딜 간 거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내를 기다렸다.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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