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가 오리여인에게 1 정겨운 이야기가 담긴 오리여인의 그림을 보면 늘 부럽고 나도 그림을 잘 그리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글과는 또 다른 감동을 주기 때문이지요. 6월의 편지는 잘 받았어요. 이사도 잘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나는 약 보름 동안 본원 밖에서 몇 차례 강의를 하며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성당에서 만난 청중 중엔 더러 어린 친구들도 있어...
문장 하나를 탁자 위에 꺼내어 둔다. ‘느껴지지 않는다.’ 다른 문장도 하나 더 꺼낸다. ‘느껴진다.’ 이제 두 개의 문장은 주전자와 찻잔처럼 나란하다. 밖으로 꺼내니 자꾸만 주목하게 되고 눈이 가니까 마음도 간다. 안 되겠다. 문장을 서랍 안에 넣고 깊숙이 밀어둔다. 보이진 않게 됐지만 그게 거기에 있는 것을 아니까 여전히 마음이 간다. 안 되겠다. 몸을 바깥으로 꺼낸다....
나는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다. 이 일을 선택했을 때 내 인생의 바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예상치 못한 따뜻함과 희망을 발견했다. 차가운 겨울 새벽, 어둠을 가르는 알람 소리가 좁은 방에 가득 찬다. 오늘도 이불 속에서 조금 더 버티다 곤히 잠든 남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일어난다. 옷을 겹겹이 껴입고 그 위에 또 작업복을 입는다. 현관문을 여니 센서등...
해질녘 오래된 가옥들이 모여있는 골목길에 접어들면 된장찌개 냄새가 난다.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집으로 뛰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내가 향하고 싶은 장소는 허름하고 낡은 고향 집이다. 지긋지긋하지만 그립고 슬프지만 아련한 그곳이다. 배달 오토바이가 내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좁은 인도에 서서 깨지고 뒤틀린 보도블록을 발꿈치로 더듬는다. 곰팡내 나는 시...
지난 4월, 코이카 해외 건설 업무를 수행하며 기록한 메모와 스케치를 모아 ‘또 다른 시선’이란 전시회를 열었다. 건축가로서 현장을 오고 가며 느낀 것을 담은 나의 흔적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어 소중한 자리였다. 1990년 ‘정림건축’에 입사해 30여 년 넘게 수많은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지만 코이카와의 ODA(공적개발원조) 사업은 유독 뜻깊었다. 역사적으로 국제사회...
나는 겨울에 태어났다. 그래서 매년 받는 생일 선물의 종류가 정해져있다. 대부분 두툼한 옷가지나 목도리 같은 겨울용품이다. 늘 고마운 마음으로 받지만 선물을 받고 놀라는 일은 없었다. 한데 작년에는 달랐다. 지난겨울에도 어김없이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마친 뒤 선물을 풀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큰딸은 내게 커다란 서류봉투를 건넸다. “아빠, 생신 선물이에요....
언의 별명은 ‘곰’으로, 단군신화에서 마늘과 쑥으로 백일을 버틴 의지의 동물인 바로 그 곰을 의미한다. 그처럼 덩치가 커다랗기 때문이다. 한때 언의 직업이 라디오 피디였던 탓에 ‘곰피디’라고도 불리는 모양이다. 무어라 불리든 언은나의 친구고 나는 기분에 따라 세 명칭 중 아무거나 골라 부르곤 한다. ‘언’이든 ‘곰’이든 ‘곰피디’든 내가 부르면 그는 항상 돌아본다. 그와 나...
어떤 사람들은 조금만 삶이 적적해지면 무언가를 자꾸 사고 싶어한다. 부정하고 싶지만 그게 바로 나다. 손가락 몇 번 움직이면 집 앞까지 상품이 배송되는 요즘 시대의 소비는 놀랍도록 쉬워서 충동과 억제의 싸움에서 이기는 건 늘 전자다. 얼마 전 나는 소문으로만 듣던 중국 전자상거래 플랫폼인 ‘알리익스프레스’ 앱을 스마트폰에 다운받았다. “알리나 테무에서 뭘 사면 괜히 재밌잖아...
〈콘클라베〉의 로렌스 단장님께 지난 4월 21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선종하셨습니다. 소식을 듣는 순간 마음이 심히 일렁였습니다. 저는 특정 종교에 소속된 사람은 아니지만 지상에서의 쓰임을 다하고 신의 곁으로 돌아간 존재 앞에선 인간적인 슬픔이 밀려오더군요. 어떤 종교를 가졌는지, 믿음의 크기가 어떠한지와 상관없이 교황의 자리는 그 자체로 크고 거룩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황의...
“유월은 함초롬히 앉아있는 달. 함초롬하게 당신을 생각할 수 있는 달.물에 젖은 것들은 늘 차분하다. 이제는 말없이도 알 수 있는늙은 개의 눈동자처럼.” 장마가 왔다가 하늘이 쾌청해졌다가 다시 끝 모를 듯 소나기가 내린다. 나는 초여름을 사랑한다. 특히 생장이 뜨겁게 시작되는 유월은 가장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을 생각하기에 좋다. 찬란한 사랑의 장면이라든가, 이제는 볼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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