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으로 이사를 온 첫 일요일, 시내 구경을 나간 우리 가족은 믿지 못할 풍경과 마주쳤다. 공원, 육교, 인도를 불문하고 앉을 자리만 있으면 어디든 꽉꽉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땅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간식을 먹고 이야기를 하고 심지어 낮잠까지 자는 사람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 휴일을 즐기고 있는 ‘헬퍼’들이었다. 홍콩은 싱가포르, ...
ⓒ 손묵광[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거기 절이 있었다 한 왕조가 있었다무너진 계백의 하늘은 어떤 빛이었을까아득한 역사의 성문을 여는 열쇠는 내게 없다시방 나침반은 어느 곳을 향해 있나낙화암의 아우성도 장수 잃은 말울음도조용히 돌에 가둔 채 석탑은 말이 없다 8m가 넘는 탑을 우러러본다. 부여에도 이보다 높은 건물은 즐비하지만 유독 이 오층석탑의 존재감이 소도시에 가득하다. ...
[군산 이영춘 가옥] 그 집을 생각하면 은목서의 향기가 떠오른다. 진녹색 잎 사이로 노란 목서꽃이 피었는데 그 향이 늦가을 바람에 실리니 그윽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집을 향해 들어가는 길목에는 샛노란 은행나무가 큰 키를 자랑하듯 서있었다. 복도를 따라 유리문을 단 건물의 옆면에는 짱짱한 단풍나무와 소철나무, 매화나무가 다채로운 초록빛 그림자를 드리웠다. 색과 향을 쏟...
공백은 늘 서먹하다. 침범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서먹함이 있다. 번역을 하거나 글을 쓸 때면 필연적으로 공백과 마주해야 한다. 먼 곳에서 출발한 언어들이 내 몸을 통과해 모국의 언어로 도착할 때도, 일관성 없이 먼지처럼 떠돌던 관념들이 더듬더듬 문장으로 모일 때도 반드시 이 공백을 지나야 한다. 모니터 흰 화면에서 깜박이는 커서는 활자가 지나갈 때마다 얌전한 학생처럼 ...
ⓒ 손묵광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마을보다 탑이 먼저 있었는지도 모른다덜 자란 두 그루 소나무를 굽어보는의젓한 탑신의 무게하늘이 낮게 드리웠다추사의 세한도보다 석탑은 더 오래풍장의 겨울을 온몸으로 견뎌왔다어느새눈발 그쳤지만새들은 가고 없다 카메라 렌즈는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를 그대로 찍어냈다. 추사 김정희가 1년 중 가장 추운 날을 그렸다는 세한도에는 추운 겨울 황량한...
[대전 소제동 철도 관사촌] 대전은 철도로 인해 탄생한 도시다. 경부선 기차역이 한적한 마을 대전리에 세워지면서 신도시 건설이 본격화됐다. 일본인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정착하여 성장하게 된 도시, 그것이 대전의 시작이었다. 호남선이 통과하면서 철도변 주변은 상업가, 환락가로 은성해졌고 온천개발을 끝낸 유성은 주요 철도 관광지로 등극했다. 철도는 도시의 풍경을 완전히 바꾸었다...
살면서 배추에게 위안을 받는 일은 흔치 않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배추를 보러 간 것은 아니었다. 태백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마을 이름에 끌려 들른 ‘귀네미 마을’에서 그 배추들을 만나게 되었다. 마을에 들어서자 해발 1,000m의 서늘한 매봉산 등성이에 거대한 배추밭이 보였다. 눈이 닿는 곳 모두 배추였다. 끝도 없이 이어진 배추들이 바다처럼 짙푸르게 넘실거렸다. 흙과 바람과...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친구여 생의 인연 하나 만나지 못했다면지상에 흔적 하나 남기지 못했다면서라벌 별밭에 숨은미인도(美人圖) 보러가자도덕산 해 기운다고 발길 재촉마라왕조 저문다고 눈물 보이지마라보아라 허리 곧추세우고이승의 강을 건너는 신라 천년의 유서 깊은 문화유적을 품고 있는 경주 도덕산과 자옥산 자락 사이, 국보 제40호 정혜사지 십삼층석탑도 거기 서있다....
[서울 새문안로 돈의문 박물관 마을] 한양도성의 큰 4개의 문 중 하나인 서대문의 또 다른 이름은 돈의문이다. 안타깝게도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문과 성곽만 흐트러진 게 아니라 성문 안 경희궁도 자취가 묘연해졌다. 1866년 경복궁을 중건하느라 경희궁의 전각들이 옮겨지면서 궁의 역할을 잃어버린 뒤로 1910년 일본인 관료 자제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성중학...
바이러스와 비. 올 여름은 이 두 단어에 갇혔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지역에서 생겨난 미생물들이 대륙을 지나고 바다를 건너 전 세계로 퍼져 내가 사는 동네 커피숍까지 침투해왔다. 막연하고 희미하던 공포가 구체적인 수치와 불길한 예측을 등에 업은 채 얇은 마스크 앞까지 바짝 쫓아왔다. 사람들은 마스크 뒤로 숨을 가렸다. 어느 먼 곳의 대기에서 무럭무럭 자라난 공기층은 바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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