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미륵사지 석탑] 미륵은 언제 오시나이미 다녀가셨나별이 명멸하듯 예언자는 떠났지만백제의 푸른 하늘은내가 받들고 있으리라나를 중심으로 해가 뜨고 해가 진다왕조를 지우기 전에 먼저 나를 지우고 가라역사의 시작과 끝은 여기서 비롯되나니굳건한 존재를 두고멸망을 논하지 말라하늘에 고하고 하늘에 묻는다면이녁이 곧 부처임을깨달을 날 있으리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탑인 미륵사지 석...
노란 금계국을 만난 곳은 경기도 연천군에 자리한 연강나룻길이었다. 금계국 주위로 연두색과 녹색의 풀들이 번져 있었고 초록의 가장자리는 땅과 나무가 감싸고 있었다. 완만하게 구불거리는 능선길이 저 멀리 옥녀봉까지 이어졌다. 옥녀봉 정상에서 높이 10m의 거대한 ‘그리팅맨’ 조각상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 왔다. 왼편으로 강이 반짝이고 눈앞으로는 낮고 부드러운 둔덕...
ⓒ 손묵광 [인제 봉정암 오층석탑] 허위허위 설악 하고도 소청봉 올랐으니암자만 보지 말고 석탑도 보고 가자구름은 태산을 품고 산은 세상 품었는데옛일 다 잊었다 하나 왕조마저 잊었으랴거룩한 부처님 진신사리 모신 곳에풍진에 마모된 역사 고려 숨결 깃들다 허위허위 소청봉 아래 해발 1244m 높이의 봉정암에 오른다. 설악산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암자 주위에는 용의 어금니같...
[서울 장위동 김중업 건축문화의 집] 덕온공주가 첫 아이를 떠나보내고 둘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비운의 죽음을 맞은 것은 스물세 살, 시집간 지 8년째 되던 1844년이었다. 공주가 짧은 생애를 마치자, 부마 창녕위 윤의선은 공주의 묘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 양자 윤용구와 함께 살았다. 윤용구는 예조판서까지 올랐으나 을미사변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장위산 아래 남령궁에서 은거...
ⓒ 백홍기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나.” 낡은 단층 건물에 있는 작은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무거운 말이 들렸다. 식당 안에는 두 남자가 앉아 찌개 하나에 소주 한 병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한 남자는 누군가를 잃었고 한 남자는 그를 위로하고 있는 듯했다. 두 남자 사이에 놓인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서는 한숨 같은 김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어쩐지 ...
ⓒ 손묵광 [지리산 법계사 3층 석탑] 바윗돌 기단 삼아천년을 버텨온 탑운평선 바다에 닿자섬들이 걸어온다지리산거기에 두고탑 하나 떠메고 왔다 지리산 좀 올랐다 자랑해도 정작 법계사 석탑 보지 못한 이가 많다. 로터리 산장에서 잠시 호흡만 고르고 곧바로 천황봉 향해 출발하기 때문이다. 탑 구경하기에는 새벽 여명이 좋은데, 산꾼에게는 정상에서 일출 보는 일이 더 중했으리라. ...
“쪽파 한 단에 얼마예요?” 한산한 공주산성시장을 기웃거리다가 쪽파 한 무더기가 눈에 들어왔다. 한쪽에는 여린 줄기의 쪽파가 깨끗하게 손질되어 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다듬지 않은 쪽파들이 흙을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다. 흙 쪽파와 다듬어진 쪽파 사이에 한 할머니가 앉아 나무처럼 투박한 손으로 부지런히 흙 쪽파를 다듬어 손질된 쪽파 쪽으로 차곡차곡 옮기고 있었다. 할머니가 고...
ⓒ 손묵광[담양 남산리 오층석탑] 담양엔 천 평 쯤의고려 하늘이 있다순창 가는 도로엔차들이 내달리는데이곳엔고려를 떠나 온진눈깨비가 내린다석탑이 기다리는그대는 누구인가기다림이 길어지면돌에도 뿌리가 난다탑에겐천년 세월이눈 깜짝할 찰나인 걸 전남 담양 읍내에서 순창 가는 길 1km 지점에 이르면 오른편 공터에 탑이 하나 서 있다. 가로수인 메타세쿼이아들이 배경이 된 풍경은 ...
빈 딸기잼 병의 상표가 잘 떼어지지 않았다. 모서리를 간신히 벌려가며 떼어내면 겉 부분만 뜯겨나갈 뿐 속 종이는 마치 태생적으로 유리병과 한 몸인 양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었다. 철 수세미가 눈에 들어왔다. 잼 병을 물에 푹 담근 채 철 수세미로 상표를 북북 문질렀다. 수세미의 무자비한 공격 덕에 남은 상표는 조금씩 병과 분리돼 마침내 모두 제거되었다. 하지만 병은 철 수세미...
ⓒ 손묵광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 돌쩌귀 달아난 날한데 바람은 찬데독 짓고 독파는 임아 어긔야 어강됴리걸어서짓물러 터진그 하루를 어쩔거나행상 나간 이녁이여무사히 돌아오소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동동다리정화수한 그릇으로빌고 또 비옵니다 정읍 은선리 석탑 앞에서 정읍사 불러본다. 행상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한 아낙네를 상상해본다. 독지어 지게에 얹어 이 마을 저 마을 떠돌며 파는 남편은 언제쯤 돌아올지 알 수 없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릴 뿐이다. 하필 남정네도 없는 집에 돌쩌귀도 달아난 방은 한 데나 다름없다. 서리 내릴 듯 말 듯 바람이 차다. 정화수 한 그릇 떠다 탑 앞에 나간다. 무사히 돌아오라고, 달님이여 제발 “노피곰 도다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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