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학원도 PC방도 없던 시절,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내가 하교 후 곧바로 향한 곳은 우리 집 창고였다. 거기에는 신문기자였던 아버지의 책들이 가득 꽂혀있었다. 터울이 큰 누나들은 모두 학교에서 자습을 하느라 늘 혼자였던 나는 이 책들을 보며 무료함을 달랬다. 《한국 신문의 역사》 《6.25 전쟁 사진전》 《서양 미술의 분류》 등 두껍고 어려운 책들을 어렸던 내가 어찌 ...
매일 아침, 나는 아홉 살 딸아이의 등교 준비로 정신이 없다. 오늘도 잠옷 바람으로 뭉그적대는 아이를 향해 잔소리를 쏟아냈다. “지각하면 어쩌려고 그래. 얼른 옷 입고 밥 먹어! 차 막혀서 빨리 출발해야 해.” 그러자 아이가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엄마, 오늘은 지하철 타면 안 돼?” 출퇴근 시간엔 학교까지 차로 1시간 정도 걸리지만 지하철로는 30분밖에 걸리지 않는...
특수학교 초등부 교사로 근무한 지 18년째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아이들과의 만남이 기다려지고 설렌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내가 특수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데는 《샘터》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대학교 1학년 때다. 집 근처에 노점을 열고 호떡을 파는 청각장애인 부부가 있었다. 호떡을 좋아해 수시로 들락거렸다. 부부는 한결같이 밝았다. 아쉽게도 나는 눈빛과 표...
지방에서 나고 자란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할머니 댁에서 살게 되었다. 처음엔 할머니와의 동거가 무척 불편했다. 해가 떨어지면 무조건 집에 들어와야 했고 도둑이 8층까지 가스관을 타고 올라올지 모른다고 여름에도 밤에 창문을 열지 못하게 하셨다. 특히 어지간해선 배달 음식을 절대 받지 않으시는 성정은 야식을 즐기는 내게 아주 치명적이었다. 어느 날은 외출했다가 ...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내 인생에 좋은 영향을 끼친 스승을 꼽으라고 하면 그동안은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내가 예순이 다 되어 누구에게든 나의 스승이라고 자랑하고 싶은 분을 만났다. 지역의 평생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수강 중인 한자반의 유정미 선생님이다. 배움에 관심이 많아 평소에 다양한 강의를 들었지만 선생님의 수업은 첫 시간부터 남달랐다.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
건강이 곧 자기관리의 첫걸음인 시대, 3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몸 관리를 해왔다. 식단도 채소 위주로 챙겨 먹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에 30분은 걸으려 애썼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건강검진을 하고 나서 의사에게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들었다. “약간의 당뇨가 있어서 치료가 필요합니다.” 당뇨병은 노년에나 걸리는 줄 알았는데 서른여덟...
지금은 장성한 세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따뜻한 말 한마디로 위안을 안겨준 이웃이 있다. 당시 우리 집은 말썽꾸러기 아이들이 집안을 휘젓고 다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바닥 전체에 매트를 깔았지만 쿵쾅대는 소리가 커서 나는 신경이 늘 곤두섰다. “조용히 해!”라고 수십 번 외치다가 목이 쉬는 날이면 ‘어쩌자고 무모하게 아내와 난 아이 셋을 연년생으로 낳았을까’...
남편과 다투고 홧김에 50일 된 아이를 남편에게 맡겨둔 채 집을 나온 길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육아와 집안일에 희생하며 아등바등 사는 현실을 잠깐이라도 잊고 싶어 기껏 간 곳은 동네 마트였다. 며칠 전에 식용유가 떨어져 제일 저렴한 해바라기씨유를 산 게 생각났다. 그에 대한 보상처럼 난 가장 좋아 보이는 올리브유를 골랐다. 그러자 뒤이어 집에서 끼니를 거르고 있을 ...
여름은 보양식의 계절이다. 삼계탕, 추어탕, 전복죽 등 원기 보충을 돕는 많은 음식이 있지만 내게 으뜸은 술빵이다. 무더위에 지치지 말라고 아내가 여름마다 만들어주는 우리 집 술빵은 모양과 색깔이 개떡과 비슷하다. 하얗지 않고 초록색인 이유는 강낭콩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고운 밀가루 반죽에 강낭콩과 막걸리를 넣고 볕 좋은 곳에 두었다가 솥에 찌면 은은한 연둣빛 빵이 완성된...
자취 생활한 지 10년이 훌쩍 넘은 나는 그동안 몇 차례 자취방을 옮겨 다녔다. 나는 이사하고 나면 동사무소나 슈퍼 같은 편의시설보다 근처 빵집부터 파악해둔다. ‘빵순이’인 내게는 입맛에 맞는 빵을 먹는 즐거움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이사 온 동네는 빵집이 많아 일명 ‘빵도동’이라 불린다는 서울 상도동이다. 출퇴근이 편하다는 장점도 있지만 맛있는 빵집이 많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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