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샘터》로부터 내가 가진 보물에 관하여 매월 연재해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2년 전 샘터와 단행본으로 연을 맺었기에 마음은 반가웠으나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보물은 ‘드물고 귀한 가치가 있는 보배로운 물건’이라는 의미인데 나에게는 보물의 가치를 지닌 물건이 없었다. 거절하려고 했으나 마음에 걸리는 점이 하나 있었다. 나는 살면서 내...
소녀와 여인은 모녀보다는 시간차를 두고 복제된 인간 같았다. 나른한 목소리, 무심코 내뱉는 말버릇, 왼손잡이인 것까지 똑같았다. 모녀는 나에게만 몸을 맡기고 안마를 받았다. 나는 두 여성의 근육 상태를 잘 안다. 어느 근육이 퇴화하고 발달했는지, 어떤 관절이 변형되고 연골이 닳았는지를 알고 있다. 둘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약해졌거나 발달한 부위가 꼭 닮아있었다. 그 사실...
오리여인이 이해인 수녀에게 해인 수녀님, 안녕하세요. 날씨가 금세 추워졌습니다. 창밖 풍경에서도 차가워진 공기의 겨울 색이 느껴져요. 딸아이도 어느새 도톰한 패딩을 입고 유치원에 갑니다. 지난 편지에서 말씀드렸던 제 얼굴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여행을 다녀왔어요. 일본 교토와 나라. 다시 가도 좋을 것 같은 곳들입니다. 교토를 떠올린 건...
이번 성탄절에는 뭐니 뭐니 해도 사과(謝過)를 받고 싶다. 너는 생각한다. 누구의 사과인지도 중요하나 그보다 더 필요한 건 사과에 어린 진심과 이를 적확히 담은 언어 표현, 사과받는 이의 마음을 살핀 시간의 흔적들이라고. 진정성이라고 치부하고 끝낼 수도 있겠지만 그 단어 하나만으로 표현하기에는 역시 부족하다. 보통 진정성이란, 직접 만난 순간 드러나는 눈가의 불긋불긋한 자...
어릴 적 크리스마스는 눈송이처럼 반짝이는 기대와 함께 찾아왔다. 예닐곱 살의 어린 나이에도 갖고 싶은 선물은 언제나 분명했다. 장난감 자동차, 레고, 동화책….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면 ‘산타 할아버지가 어떤 선물을 놓고 가실까?’ 하는 설렘을 안고 잠이 들었다. 그날 밤도 무슨 선물을 받을지 잔뜩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는데 한밤중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그런데 내...
가끔은 남의 손을 타지 않은 책을 빌리고 싶을 때가 있다. 다행히 도서관마다 신간들을 한동안 따로 분류해둔다. 그날도 새 책을 만져보고 싶어 신간 서가로 갔다. 맑고 깔끔한 표지의 책을 한 권 골라 새벽공기 같은 손맛을 느끼고 싶었다. 신간 서가는 여유롭다. 다른 서가처럼 책을 빼곡하게 꽂아두지 않는다. 공간의 여백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도서관의 책들은 대개 비집고 들어...
예기치 못한 감동과 마주했을 때 여운이 더 짙다는 걸 얼마 전 한 편의 공연을 통해 새삼 느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맘껏 끼를 펼친 뮤지컬 〈아리스토캣(The Aristcats Kids)〉은 작품성만 놓고 판단한다면 완성도가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극에 등장하는 배우들도 모두 나이 어린 아마추어여서 대사나 춤, 노래가 조금씩 어색하다. 그러나 이 무대의 매력은 높은 예...
나는 사실, 선물을 받는 일에 큰 설렘을 느끼지 못한다. 이유를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아마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배려와 사랑으로 결핍을 느낄 틈이 없어서였던 것 같다. 그래서 무언가를 특별히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별로 없다. 그저 여름이 시작되면 자두가 먹고 싶고, 여름의 끝이 오면 까맣게 익은 포도를 찾는 정도다. 하지만 문득문득 찾아오는 일상의 ...
어지러운 꿈에서 튕겨 나오듯 깨었다. 번쩍 눈을 뜨자마자 안경부터 찾았다. 이게 무슨 꿈이람. 놀란 가슴을 쓸어내었다. 그러니까, 하고 되짚어보려는 순간 꿈은 한 발짝 물러난다. 붙잡아보려고 애를 쓸수록 물러나 버리던 꿈은 어느새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안경을 쓰고 시계를 확인한다. 새벽과 아침 사이. 베개에 머리를 내려놓는 순간 두통이 느껴졌다. 침을 삼킬 때마다 목이 아...
퇴근 후 금요일 저녁 7시 넘어 도서관에 도착했다. 2주 전에 빌렸던 책을 반납하고 나서 한가롭게 서가를 오갔다. 에세이처럼 문체가 가벼워 술술 읽히는 일본 소설들에 눈길이 가 한참을 머물다 좀 더 안쪽 서가로 들어갔다. 유럽 소설들이 모여있다. 프랑스 소설을 몇 권 집었다 놓았다가 하면서 내용을 살폈다. 프랑스 소설은 사람들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려 한다. 풍경과 상황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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