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드니 점점 더 편한 옷을 선호하게 된다. 결혼식 같은 특별한 자리를 위해 구매한 비싸고 불편한 정장이나 충동적으로 산 멋진 옷들은 대부분 한 번만 입게 된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장롱 안에 잠재우다 결국 수거함에 넣는다. 유행에 맞춰 새로 산 옷들은 떠나보내고 늘 입던 익숙한 옷 몇 벌만으로 계절을 보낸다. 어차피 새로 산 옷은 몇 번 입지 않을 게 뻔하다보니 옷을 ...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10여 년 전, 학교에서 아프리카 아이들을 돕는 목적으로 한 달에 한 번씩 동전을 모아오라고 한 적이 있다. 적은 액수지만 지구 반대편 아이들에게 단비처럼 쓰이기를 바라며 난 매월 동전과 지폐를 섞어 2천 원 정도를 저금통에 채워서 보냈다. 성금 모으기는 2년 정도 유지되다가 폐지됐지만 굶주릴 아이들을 생각하면 도움의 손길을 거둘 수 없었다. 그 이...
나는 매주 일요일마다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성당까지는 걸어서 25분. 봄가을은 물론이고 겨울에도 볕이 따뜻하다면 기분 좋게 걸을 수 있는 코스다. 하지만 여름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삼복더위에는 집을 나서기가 망설여진다. 나는 여름이 두렵다. 아기 때 태열이 아토피로 번진 탓에 땀이 조금만 나도 간지럽고 울긋불긋해진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피...
1981년 크리스마스이브,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샘터》를 읽으며 고국을 떠나는 슬픔을 다독이던 순간이 생생하다. 가족, 친구들과의 이별을 뒤로하고 낯선 땅으로 떠나는 나는 외롭고 불안했다. 그런 내 손에 들린 책자는 그리움과 희망의 상징이었고, ‘나는 어떻게 섰나’라는 주제의 특집 기사를 읽으며 새로운 환경에서 나 자신을 어떻게 바로 세울지 깊이 고민했다. 《샘터》와...
요즘 나는 화, 수, 목요일이 기다려진다. ‘시니어 일자리’ 제도를 통해 찾은 학교 급식 도우미를 하러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지난 3월부터 집 근처 중학교로 일주일에 세 번 출근하고 있다. 나는 하루 세 시간 정도 점심 급식을 보조하는 일을 한다. 작은 역할이지만 우울하고 생기 없이 지내던 내 일상에 큰 활력이 된다. 이 일을 하면서부터 74세의 나이에도 일할 수 있다는 ...
나는 사춘기를 막 지난, 열일곱 살 소녀다. 툭 하면 화나던 마음이 지금은 많이 얌전해졌다. 그러고 나니 그동안 엄마, 아빠와 지낸 시간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른다. 사춘기가 유독 지독했던 2년 전 봄. 그때 나는 모든 면에서 엄마, 아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휴일에 하루 종일 TV만 보는 아빠도 싫었고 가끔 말투가 퉁명스러워지는 엄마도 이해 불가였다. 나를 흠 없이 양육해...
내겐 제때 버리지 못한 영수증들을 화장대 한쪽 구석에 쌓아두는 버릇이 있다. 얼마 전, 너저분해진 화장대를 큰맘 먹고 정리하다가 영수증 더미 속에서 쿠폰 두 장을 발견했다. 우리 동네 도서관에 있는 카페 쿠폰으로 ‘7개의 스탬프가 찍힌 쿠폰을 가져오시면 기본 음료 무료’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쿠폰 한 장에는 스탬프가 다섯 개, 나머지 한 장에는 한 개가 찍혀 무료 음료를마...
맞벌이를 하는 딸을 대신해 손녀를 돌봐주고 있는 요즘, 나는 여덟 살 손녀를 위해 요리하는 순간이 제일 즐겁다. 일이 늦어져 아이 저녁까지 부탁한다는 딸의 연락을 받으면 설레기 시작한다. ‘오늘은 어떤 맛있는 요리를 해줄까?’ 손녀는 내가 만들어주는 음식은 다 맛있게 먹지만 그중에서도 호박전을 가장 좋아한다. 살캉살캉 씹히는 식감이 재밌는지 방긋방긋 웃으며 한입 가득 입에...
경기도 양평의 시골 산기슭에 있는 나의 전원주택은 대지가 300평이다. 면적으로는 회장님 저택이 부럽지 않지만 가격으로는 서울의 웬만한 서민 아파트의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않는다. 내가 이 넓은 집을 선택한 이유는 텃밭 때문이었다. 원래 이 집의 절반은 텃밭이었다. 나는 농사를 지어본 경험도 없고 잘 지을 줄도 모르지만 농사짓는 걸 좋아한다. 물론 농사라고 해봐야 텃밭에서 ...
얼마 전에 이사온 동네가 한동안 낯설었다. 자주 가는 마트, 단골 카페, 쉬어가는 벤치 등이 없는 생활 터전은 삭막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조금씩 정이 들기 시작한 건 인자한 의사 선생님을 만난 뒤부터였다. 갑상선 질환으로 한 달에 한 번 약을 처방받아야 하는 나는 새로운 동네에서 꾸준히 다닐만한 병원을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낯선 동네에서 병원을 물색해야 하니 신세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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