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만취하면 잠이 드는 술버릇을 갖고 있다. 한번은 지하철에서 잠이 들어 2호선을 타고 두 바퀴나 돌았으며, 또 한번은 길가에 쓰러져 잠든 남편을 보고 지나가던 행인이 대신 내 전화를 받아준 적도 있다. 남편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한동안 술을 멀리했다. 그러던 얼마 전, 남편이 모처럼 고등학교 동창들과 만난 날 기어이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집에 와서는 휴대폰이 보...
옷 정리는 내가 매년 봄마다 하는 통과 의례다. 우리 집 장롱에는 화려한 꽃무늬 양말이 많다. 친정에 갈 때마다 엄마가 하나둘 가방에 넣어준 것들인데 색깔과 무늬가 너무 강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신지 않았다. 버리기엔 아까워서 외출할 때 신으려는 시도도 몇 번 해봤지만 역시 내 취향은 아니었다. 노란색, 분홍색, 초록색, 심지어 여름용 꽃무늬 망사까지 내 눈엔 촌스럽기...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나의 하루는 음악을 크게 틀어 잠꾸러기 아이를 깨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이는 잠결에 들리는 음악에 맞춰 이불 밖으로 발가락을 쏙 내밀고 까딱까딱 장단을 맞추며 잠을 쫓는다. 침대에서 일어난 아이의 등교 준비를 도와주고 현관까지 배웅한 다음, 나는 숨 돌릴 새 없이 부엌으로 향한다. ‘맛물’을 끓이기 위해서다. 맛물은 비염에 좋다는 작두콩 몇 알에 통옥...
작년 가을, 아주 특별한 여행을 다녀왔다. 몇 년 전 아빠가 돌아가신 뒤로 세 식구가 된 엄마, 오빠와 떠난 우리 가족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아마 그때 우리가 용기를 내지 못했다면 엄마는 인생의 새로운 즐거움을 여태껏 모르고 살았을지 모른다. 내가 중학생이던 20년 전부터 엄마는 공황장애로 인한 호흡 곤란과 어지럼증으로 힘들어했다. 문득문득 찾아오는 증상이 이젠 계절의 변화...
우리 집 식탁은 언제나 시어머님이 만들어준 반찬으로 풍성하게 차려진다. 어묵볶음, 진미채 무침, 멸치볶음 같은 밑반찬은 기본이다. 두부와 새우젓, 팽이버섯을 넣고 끓인 탕국이나 홍어 내장으로 간을 한 조림은 집 나간 입맛도 돌아오게 만드는 어머니만의 특별 요리다. 요리 내공이 남다른 어머니의 음식은 무엇이든 맛있지만 독창적인 레시피로 만드는 메뉴들이 항상 우리 식구의 입맛을...
매일 출근하기 전, 한 시간씩 운동한 지 2년 정도 되어간다. 정형외과에서 일자목 진단을 받고 등록한 헬스장은 이제 나의 하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되었다. 꾸준히 운동한 덕에 두통도 많이 줄고 감기도 잘 걸리지 않으니 운동의 매력에서 헤어나오기 어렵다. 요새는 헬스장에서 얻는 즐거움이 하나 더 생겼다. 매일 동일한 시간에 마주치는 그들은 이름이 금옥, 경옥이어서 나는...
삶의 위안은 때때로 작은 생명에게서 얻어진다. 지독하게 추운 겨울 같은 나의 봄, 요즘 나는 친정집 마당에 심은 여린 꽃나무에게 위로를 받으며 지낸다. 장미 나무와 작약 구근은 칠순을 맞이한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었다. 평소에 꽃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엄마의 환한 표정을 떠올리며 관목을 구매해 친정집 마당에 심었다. 수시로 친정에 가서 나무를 돌보며 엄마에게 어서...
국민의 대부분이 가난했던 시절, 내 부모님은 식구들 배곯지 않도록 아침부터 저녁까지 비지땀을 흘렸다. 쌀밥 한 그릇에 간장만 있어도 꿀맛인 시절이었다지만 조금이라도 더 배불리 먹이기 위해 고생하셨던 부모님의 끈끈한 사랑이 난 잊히지 않는다. 아버지는 뒷산에 땔나무를 하러 가셨다가 어스름에 들어오셔서 지게를 푸시고는 깊게 한숨을 내뱉으셨다. 마루에 앉아 가쁜 숨을 돌리며 먼 ...
어린 시절 나는 부모님을 꽤 애태우는 허약한 아이였다. 감기에 한번 걸리면 병원을 여러 군데 다녀봐도 좀처럼 낫질 않아 1년 내내 감기를 달고 살았다. 연신 흐르는 콧물을 닦아내느라 옷소매는 늘 반들반들했다. 그나마 콧물은 애교였다. 새벽녘 잠들기 전까지 가슴이 울릴 정도로 마른기침을 해대 부모님을 속상하게 했다. 보다 못한 부모님은 용하다는 병원을 수소문하며 찾아 나섰다....
퇴근하는 발걸음이 빨라진다. 허겁지겁 달려온 어린이집. 언제나 그랬듯 새싹반 신발장에 남아있는 신발은 두 개다. 딸아이와 옆 동에 사는 ‘리안이’ 신발이다. 오늘도 다른 친구들은 벌써 다 집에 가고 둘만 남은 모양이다. 리안이네 부부도 맞벌이를 하고 있어 우리처럼 하원 시간이 늦는 편이다. 엄마, 아빠를 기다리며 둘이 놀다 보니 자연스레 제일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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