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를 놓고 고심이 깊어지면 무엇에도 신경을 쓰지 못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어떤 소리가 나는지 더러 내가 어디에 앉아 있는지를 잊을 때도 있다. 그런 몰입이 자주 찾아오면 좋겠으나 현실은 바람을 비껴가는 법이다. 마감이 시급할 때, 도무지 원고를 미룰 수 없게 되었을 때 이따금 나는 채워야 할 여백 속으로 빨려들어가 글자를 새겨넣는다. 코앞 마감에 등 떠밀려 간신히...
오랜 세월이 지나야 비로소 빗장이 풀리는 이야기들이 있다. 20세기를 앞두고 세상이 혼란하던 130년 전쯤이다. 상투를 틀고 비녀를 꽂은 한복 차림의 부부가 미국 땅을 밟았다. 조선을 대표해서 온 것이었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 4대 공사 이채연. 명목은 그럴듯했으나 국운이 다해가는 동양의 약소국을 알아주는 이는 없었다. 숨 막히는 하루를 보내고 나면 같은 말을 쓰고 같은 피부...
어린 시절, 방학은 나에게 오지 않았으면 하는 시간이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는 일하러 나간 엄마를 기다리며 하루 종일 방학 숙제를 해야 했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극심한 사춘기를 겪었다. 대학에 가서도 방학이 달갑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방학 동안 돈을 벌지 않으면 다음 학기 등록금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에 두세 건의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던 ...
토요일 오전이었다. 10시에 마사지 예약을 한 고객이 20분을 지각했다. 10분 간격을 두고 연속해서 다음 예약이 잡혀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접수 직원에게 예약 고객들께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하고 시간을 조절해 달라고 부탁했다. 접수 직원은 내 말을 들었음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나 불편한 이야기는 제 입으로 하고 싶지 않아 했다. 시간 여유만 ...
“그림자야 그림자. 아주 환한 때일수록 그 자리를 들여다보는 마음을 가지렴.” 9월의 대학가는 이상한 느낌을 준다. 3월 신학기 때만큼의 흥성한 느낌은 없지만 무언가를 당차게 결심하는 학생들이 자주 보인다. ‘1학기 때처럼 술만 마시다가 시간을 보내지는 않겠다’라든가, ‘이번 학기에는 책을 백 권 읽겠다’ 라는 식의 당찬 다짐들. 물론 이런 결심은 가을 나무에 매달린 과일처...
오리여인이 이해인수녀께 지난여름 가까운 사람을 둘씩이나 떠나보냈다는 수녀님의 편지를 읽고 나니 마음이 먹먹해져 가슴에 돌 하나가 들어앉은 느낌입니다. 성인이 되어서는 아주 가까운 사람을 떠나보낸 경험이 없어서 저에게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늘 막연하고 두렵기만 합니다. 언젠가 가족이나 제 주변 사람을 떠나보내야 할 때가 올 텐데 상상만으로도 코끝이 아려옵니다. 수녀님 곁을 지...
식사가 끝날 무렵, 엄마가 식탁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과일 먹자.” 그 한마디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다. 오늘날의 식도락 생활상은 육식이 미식의 패권을 꽉 쥐고 있는 살벌한 현실이지만 육식이 절대 넘볼 수 없는 채식만의 분야가 있다. 디저트다. 생각해보라. 그 어떤 최고급 코스요리도 난잡한 맛으로 얼룩진 혀를 깨끗이 닦아내고 화려하게 대미를 장식해야 하는 순간에...
우리 집에서는 1년에 한두 번 명절 같은 주말 풍경이 펼쳐진다. 토요일 점심때가 되자 두 아들과 조카가 연이어 집에 도착했다. 셋 다 결혼해서 아이를 한 명씩 낳았으니 모두 아홉 명이다. 돌잡이가 두 명, 8개월짜리가 한 명으로 세 아이 모두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 우리 부부만 살아 조용했던 집이 모처럼 잔칫집처럼 북적거렸다. 두 팀은 서울에서, 한 팀은 진주에서 평택까지 ...
일기는 매일 쓰는 것이 아니다. 날을 잡아 한 번에 몰아 쓸 수도 있다. 일기(日記)가 아니라 일기(一記)인 셈이다. 일기 쓰기가 가장 중요한 방학 숙제였던 시절에는 말이다. 방학 숙제는 말 자체가 형용모순이다. 놓을 방에 배울 학, 방학(放學). 문자 그대로 배움을 내려놓는 게 방학의 본질이라면 숙제는 왜 그리 많았을까. 방학이 시작되기도 전에 검사를 받아야 했던 생활계획...
〈룸 넥스트 도어〉의 잉그리드에게 잉그리드, 저는 여행을 가면 그 나라의 장례 문화나 묘지를 탐색하는 습성이 있어요. 특히 유럽 지역을 여행할 때면 제가 사랑하는 작가들의 묘지를 꼭 찾아가 보곤 하는데요. 유럽의 묘지들은 공원처럼 조성돼있고, 그 미감도 참으로 아름다워서 천천히 걷다보면 시간이 정지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얼마 전 펴낸 책의 에필로그에는 ‘나의 묘비명’을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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