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대온실 밤에 궁궐을 거닐어본다. 일몰을 지나면서 어둠이 내려앉은 궁궐은 낮과는 다른 얼굴이다. 공간이 더 깊고 넓어진 것은 단지 느낌일까? 많은 담장의 모서리에서 묘한 존재들이 불쑥 나타날 것만 같다. 낮 동안 역동적이고 쓸쓸한 역사의 현장이 밤엔 환상과 모험의 장소로 얼굴을 바꾼다. 낮엔 역사가의 시간이, 밤엔 소설가의 시간이 궁궐에 흐른다. 창덕궁이...
경복궁 집옥재 경복궁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여러 곳이다. 나는 서문에 해당하는 영추문이나 북쪽 담에 맞닿은 신무문을 주로 이용한다. 문도 작고 관광객도 적지만, 신무문 쪽엔 내가 좋아하는 공간들이 모여있기 때문이다. 건청궁과 집옥재, 향원정과 같은 경복궁의 내밀한 이야기를 간직한 공간들. 북쪽에 있다는 건 중심 영역에서 멀리 물러나 있다는 뜻이다. 이쪽엔 ...
대가족이 살 맞대고 살던 충남 부여의 ‘농부의 집’에 가면 농부의 정직하고 근면한 삶의 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집 곳곳에 놓인 낡은 농기구들을 구경하고, 오랜 세월 집을 지탱하고 있는 나무 기둥을 쓰다듬으면서 집이 전하는 옛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부여행 버스 티켓을 끊은 날부터 마음은 이미 어느 한적한 농촌에 가있었다. 나이가 들면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살...
창덕궁 연경당 ‘동궐도(東闕圖)’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든 전각을 그려놓은 조감도식 그림이다. 순조 연간인 1830년대에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전각의 모양이 정교하며 연못, 나무, 상징성을 담은 기물까지 모두 그려졌다. 나는 화첩 형태로 된 동궐도를 갖고 있는데 펼칠 때마다 담장과 문에 시선이 간다. 조선은 담장의 나라였다. 수많은 전각이 저마다...
사슴이 뛰어다니고 호수 같은 바다가 사방을 둘러싼 청정한 섬, 굴업도. 이곳 천혜의 자연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섬을 떠나지 않고 지킨 주민들의 노력이 있었다. 굴업도를 아끼는 마을 주민들의 마음은 이제 지친 도시인들을 품어주고 있다. “원래 무인도였어. 그러다 덕적도에서 장골에 부리부리하게 생긴 태월 할머니가 남편 잃고 아이 넷을 데리고 이 섬에 들어와 산...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의 한 작은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마당을 비추는 햇볕은 맑고 방안에 감도는 분위기는 포근하여 일상에서 쌓인 피로와 긴장이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초봄의 포근한 햇살에 기분 좋은 나른함이 감돌던 오후, 전북 남원 시내에서 2-231번 버스를 타고 여원재로 향하는 길이었다. 운봉읍과 이백면 사이, 해발 477m에서 푸른 하늘을 지붕처럼 드리...
이탈리아 산 비토 알티볼레 그해 여름엔 중부 유럽을 차로 도는 긴 여행을 했다. 프랑스 북부에서 남쪽 지중해 쪽으로 수직으로 횡단해 해안가를 따라 이탈리아로 건너갔고, 북부 이탈리아를 돌다가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다. 오스트리아의 서쪽 지방을 따라 국경 너머 독일로 이동, 독일 중부의 오래된 도시들을 둘러보고 스위스를 거쳐 파리로 들어오는 일정이었다. 이 여행엔 ...
‘불나방 형’을 처음 만난 것은 10여 년 전, 일본 본섬의 북쪽 끝 아오모리에 있는 하코다 산에서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인생 아웃도어 활동’은 스키다. 그것도 스키장에서 타는 것이 아닌 삼나무를 다 덮고도 남을 만큼 많은 눈이 내리는 산에서 타는 스키다. 이런 산에서는 등산화를 신고 등산하듯 스키를 신고 걸어 올라간다. 경사진 사면에서 뒤로 밀리지 않게 해주는 스킨...
몇 해 전에 일본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본 여성들은 어떤 이유로 서울을 좋아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서울에 오면 런던도 있고 파리도 있고….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 있어서요.” 그녀의 답변에 나는 깜짝 놀라며 응답했다. “우리는 똑같은 이유로 도쿄에 가는 걸요!” 도쿄로 가는 길이 막혔던 지난 3년간은 일본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달라지기에 충분한 시간이...
참 별도 많은 밤이다. 경기도 포천 명성산 자락에 자리한 산정호수 캠핑장의 겨울밤. 저녁을 먹고 텐트를 나서서 바라본 하늘은 쏟아져 나온 무수한 별들로 반짝였다. 은하수가 흘러가는 모습도 선연했다. 어째서 겨울이 오고, 밤이 길어질수록 밤하늘의 별은 많아지는 걸까. 별은 왜 손발이 꽁꽁 얼도록 추운 날에 더 또렷하게 빛나는 걸까. 별빛 가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그리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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