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나는 마음이 잔뜩 들떠 있었다. 송년회도 없이 심심한 연말을 보내던 참에 가고 싶은 팝업스토어가 생겨 방문 신청을 해놓고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공간을 얼마나 예쁘게 꾸며놨을지, 선물은 얼마나 많이 줄지 기분 좋은 상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그 연락을 받고 말았다. 연말에 집에 놀러 오겠다는 동생의 전화였다. 결혼한 동생이 친정 식구와 ...
몇 달 전 이사를 하면서 출퇴근이 그야말로 고역이 되었다. 전에 살던 동네에서는 버스를 타고 회사까지 쭉 앉아 갈 수 있어 편했는데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사람들로 가득 차서 숨쉬기도 버거운 지하철에 몸을 실어야 했다. 내가 타는 4호선은 동작역과 이촌역 사이 한강을 건너는 구간이 있어 멋진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콩나물시루처럼 승객이 빽빽한 ‘지옥철’에서는 언감생심 ...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뚜벅이’ 예찬론자였다. 차 막히는 도로에서 시간을 허비하느니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라 믿으며 서른여덟이 되도록 운전면허 없이 뚜벅이 생활을 고수해 왔다. 그랬던 내가 운전을 배워 자동차를 몰기로 결심한 건 순전히 엄마 때문이었다. 지난해 엄마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목의 통증을 호소했다. 옆에서 듣기에 목소리...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 삶은 순탄했다. 대학 진학, 취직, 결혼, 임신 등등 인생의 대소사들이 문제없이 진행됐다. 하지만 남편이 지방으로 발령을 받으면서 강원도로 이사 온 뒤로는 하루하루가 참 힘겨웠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타지여서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아기와 나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만날 사람도, 하소연할 친구도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집 앞 놀이터에 앉아...
“여기요! 콩나물국밥 두 그릇 주세요.” 여러 번 주문을 했지만 일하는 아주머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손으로 음식점 입구에 있는 기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주문은 저기 키오스크로 해주세요.” 지난번에 왔을 때만 해도 보이지 않던 기계가 매우 낯설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키오스크 앞에 섰다. 그러나 그 이상한 기계 앞에서 내 눈동자와 손가...
나는 결혼한 지 20여 년 된 워킹맘이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많았던 나의 결혼 생활. 다사다난했던 세월이 그래도 행복하게 추억되는 건 시댁 어른들 덕분이다. 20대 중반에 친구의 소개로 처음 만난 남편과 본격적으로 혼담이 오가기 시작할 당시에 나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결혼은 축복 넘치는 인생의 큰 이벤트이건만 난 어쩐지 초조했다. ‘결혼이란 걸 반드시 해야 하는 걸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는 것만큼 멋진 모습은 없다. 그 사실을 난 우리 동네 미화원을 보고 실감했다. 월, 수, 금 오후 4시 30분이면 어김없이 동네에 나타나던 미화원 아저씨는 허투루 일하는 법이 없었다. 길가에 내놓은 종량제봉투를 그대로 가져가면 빠르고 편할 텐데 일일이 열어보고는 일반쓰레기와 음식물쓰레기, 재활용 쓰레기를 다시 한번 정확히 분리한 다...
지난해 가을, 남편이 경남 남해로 발령을 받으면서 서울집을 한동안 비워야 했다. 남편 혼자 지낼 집의 살림살이만 대충 정리해주고 곧바로 올라올 생각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차일피일 미뤄져 두 달이라는 시간이 휙 지나고 말았다. 남편 뒷바라지로 바쁘게 지내다 날이 슬슬 추워지기 시작해서야 오래 비워둔 서울집이 걱정됐다. 특히 베란다에 내놓은 행운목이 제일 마음에 걸렸다. 친구에게...
코끝 시린 겨울이 되면 할머니와 처음 만난 날이 떠오른다. 생각해 보면 할머니와의 인연은 엄마가 내게 남긴 마지막 선물인 것 같다. 그해 겨울은 마음이 무척 시렸다. 치매를 앓던 엄마를 떠나보내고 도통 마음 잡지 못하던 때였다. 집에 있으면 자꾸 엄마 생각이 나서 일부러 밖에 나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날은 길을 걷다 쌀쌀한 바람에 뜨끈한 어묵 하나 사...
2년 전에 맞이한 스물여섯의 여름은 혹독한 겨울 같았다. 엄마를 암으로 떠나보냈기 때문이다. 너무나 빨랐던 엄마와의 이별이었다. 엄마가 떠난 뒤로 하루하루가 힘겨웠다. 회사에서는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훔치기 위해 화장실로 달려가기 일쑤였고 엄마가 없는 집에 들어가는 게 너무 괴로워 퇴근 후에도 동네 놀이터에 멍하니 앉아있곤 했다. 시든 화초처럼 하루를 보내고 쓰러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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