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얼마 전 인쇄소에 갔다가 색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고른 종이에는 별색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보기엔 아름답지만, 조금이라도 부주의하면 얼룩이 지고 쉽게 망가져 버린다고요. 그래서 사람들은 결국 가장 무난하고 안전한 먹색을 고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어쩐지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당신의 옷장에는 회색과 베이지, 흰색 계열의 옷들만이...
외증조할머니는 외할아버지와 다섯 살 차이였다. 그녀는 두 번 상처한 나이 많은 남성과 스물세 살에 혼인했다. 그와의 사이에서 딸 하나를 낳았고 혼인한 지 10년 만에 미망인이 되었다. 의붓아들과 며느리가 한집에 살았는데 첫 번째 종부는 아이를 낳다 죽었다. 두 번째 종부는 시집올 적부터 허약해 아이를 둘 낳고 몇 년간 병석에 누워있다가 유명을 달리했다. 의붓아들은 세 번째 ...
바다는 모든 걸 넉넉하게 받아주고 용납해주는 지친 마음들의 피난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걸 알면서 작은 바람에도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순간이면 나는 푸릇푸릇한 물결의 품으로 파고든다. 고운 모래밭에 서서 끝을 가늠하기 힘든 수평선을 바라보노라면 머릿속에 똬리를 튼 염려가 작디작게 느껴지곤 한다. 다행히 지금 사는 곳에서 바다가 멀지 않다. 차로 세 시간여를 달리면 멕시코...
“하이? 마이 네임 이즈 A. 하우 아 유?” 언니를 처음 만난 건 30여 년 전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한 어학원 휴게실에서였다. 그날 난 영어 레벨테스트를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뒤 쉬는 시간이 되자 교실에서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파란 눈의 유럽 학생들, 까만 머리의 동남아 학생들, 수줍고 예의 바른 일본 학생들 틈에 한국 학생들도 더러 섞여있었다....
어느 저녁, 우연히 시인 C를 만났다. 알고 지낸 지 어느덧 스무 해가 다 되어가는 C와 나는 대학 동문이다. 굳이 학번을 따지자면 내가 선배이나, 그가 나이도 열 살 남짓 윗길인 데다 많은 부분에서 존경하는 사람이라 형이라 부르고 선배라 여기며 가깝게 지내고 있다. C와 나누는 대화는 늘 즐겁다. 맺고 끊음이 분명하고 심각한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그의 화법을 나는 ...
3년 전 여름, 결혼하자마자 아내와 별거 아닌 별거를 하게 됐다.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Fiji) 사무소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보통 파견국에 가족이 처음부터 동반하는 경우가 많지만 낯선 외국 생활이라 우선 내가 먼저 터를 닦아 놓은 뒤 아내는 6개월 뒤에 합류하기로 했다. 내가 근무하는 코이카 피지사무소가 위치한 수도 수바(Suva)는 생각보다 작은 도시였다. 수도라...
10여 년 전 직장에서 만나 깊은 우정을 쌓아온 선배와 오랜만에 안부를 주고받았다. 요즘 선배의 최대 관심사는 곧 고등학생이 되는 첫째의 교육이었다. “우리 부부처럼 사교육하고 담쌓은 부모도 흔치 않을걸? 대부분 애들은 학교 끝나면 곧장 학원에 가서 밤 11시나 돼야 집에 온다더라. 나도 조만간 보내야지. 근데 난 지금이 너무 좋아.” 부부가 모두 음악을 전공한 선배네 저녁...
나는 우표 수집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네팔 우표는 수집가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무수히 소장하고 있다. 40여 년 전에 학술 대원으로 처음 네팔 땅을 밟으면서 네팔을 소개하는 글에 삽화로 활용하기 위해 모았던 것이다. 당시 몇몇 등반가들이 네팔로 히말라야 원정을 떠났다. 이들의 여행기를 보면 험준한 산을 오르는 고단함과 정상에 올랐을 때의 소회가 대부분이었다. 반대로 나...
새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인생과 그렇지 않은 인생은 어떻게 다를까. 지난 토요일, 생애 첫 새 관찰 체험에 다녀왔다. 장소는 뉴욕의 프로스펙츠 파크. 공원 동쪽의 공용 화장실 앞에 신청자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나풀거리는 반팔에 가벼운 배낭을 메고 목에 망원경을 둘렀다. 이것은 탐조에 관심이 많은 배우 릴리 테일러가 집필한 ‘새’에 관한 신간을 기념하는 특별 행사였...
“우산이 없었다. 비가 세차게 내렸다.처마 밑에서 한참 동안 비를 긋다가우리는 달리기 시작했다.” 8월은 한껏 볕이 내리쬐다가도 순식간에 폭우가 쏟아지기도 하는 변덕스러운 때다. 그래서 8월은 물방울의 시간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땀방울과 빗방울을 번갈아 오가다보면 어느새 여름은 느릿느릿 꺾이고 만다. 여름에 보는 비는 묘하게 처량하기도 하고 때로는 청량하기도 한데 오늘은 ...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