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맑은 하늘이 야속했다. 개화를 시작한 꽃망울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나는 일기 예보를 살피며 비 소식을 기대했다. 기상캐스터도 내 마음과 같은지 강풍 소식을 전하며 죄스러워했다. 열어둔 창으로 매캐한 연기 냄새가 들이치는 것 같았다. 아래 산간지방에서 연달아 산불이 발생했다. 스무 차례 발화가 발생했고 그로 인한 사상자가 수십 명이었다. 산림은 물론이고 주거와 일...
친구 A는 매번 약속 시간에 늦는다. 5시 약속이면 5시 10분쯤에 차가 막혀서 20분 늦는다고 전화가 온다. ‘그래, 20분 정도는 기다릴 수 있지.’ 마음을 다스려 보지만 30분이 넘어가면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오기 시작한다. ‘화내지 말자. 오늘은 분명히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야.’ A는 다시 5시 40분쯤 전화해서 나에게 어디냐고 묻는다. ‘이게 뭔 어이없는 질문인가...
빌렸던 책을 반납하러 도서관 로비에 들어가다가 멈칫했다. 문득 내가 도서관을 너무 푸대접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도서관에 앉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책을 빌리고 2, 3주가 지난 뒤 책을 돌려주려 도서관에 간다. 그리고 서가를 돌며 눈에 들어오는 책을 집어 대출 프런트에 가서 책을 빌린다. 그리고 반납한다. 빌린다. 반납하고 또 빌린다. 갑자기 도서...
오리여인이 이해인 수녀에게 수녀님 그간 잘 지내셨나요? 뜨거운 여름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저는 마치 어항 속에서 뻐끔거리는 물고기가 된 듯 높은 습도를 온몸으로 느끼며 지내고 있습니다. 최근 저에게 생긴 가장 큰 일은 제일 오래된 친구이자 가까운 친구가 큰 수술을 받았다는 거예요. 병원에서 친구의 몸속 장기들이 잘 자리 잡을 때까지 한 달간 누워있고 두어 달을 조심하라...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 씨에게 정원 씨, 해마다 8월이면 어김없이 당신이 떠오릅니다. 영화가 개봉된 해가 1998년이었으니 그로부터 2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네요.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스크린 밖의 저는 무럭무럭 나이 드는데 스크린 속 당신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인 게 억울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오늘은 맘 잡고 상상해봤어요. 만약 당신이 이 세...
“밥, 면, 빵, 떡을 좋아하는 순서대로 말해볼래?” 이 질문을 하고 다닌 지도 10년이 넘었다. 개인적으로는 “MBTI가 뭐예요?”보다 좋아하는 질문이다. 상대의 음식 취향을 앎으로써 식사 약속을 잡기 편해지고, 탄수화물 사대천왕 중 누가 최강자인지 알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그런 걸 왜 물어보냐며 피식거리다가 어느새 쓸데없이 진지한 자세로 고민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얼굴을...
일요일만 되면 우리 집은 비누 향으로 가득 찬다. 속옷과 수건을 끓는 물에 꼭 삶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가스레인지 위에서 빨래가 폭폭 삶아지느라 커다란 냄비 뚜껑이 불규칙하게 들썩일 때마다 하얀 김이 피어오른다. 그러면 나는 집 안 구석구석까지 깨끗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모든 방문을 활짝 열어둔다. 빨래 삶기는 의외로 손이 많이 간다. 맨 처음 빨랫비누로 애벌빨래를 하고...
손현주(29) 님의 초대장장소 서울시 강남구에서 가장 시원한 원룸 @blue_panda_home수취인 바닷속을 헤엄치고 싶은 사람드레스코드 블루 여러분은 혹시 자신의 퍼스널컬러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퍼스널컬러란 사람의 얼굴에 가장 어울리는 색을 말해요. 요즘엔 이 색을 찾아주는 업체도 많아서 자신에게 맞는 색을 쉽게 찾을 수 있어요. 전문가에게 진단받아 보면 좋아하는...
고교 시절, 나는 일주일에 최소 대여섯 번이던 수학 시간마다 교과서 안쪽에 근대 소설책을 쓱 끼워 읽는 이과생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졸린 눈을 비비며 억지로 자율 학습을 할 때마다 ‘지금 이 나라에 진정한 학문이란 존재하는가’라는 다소 심오한 회의감에 빠지곤 했다. 그 시절, 유일한 낙이자 취미 생활은 사전 읽기였다. 특유의 맨들맨들하고 가벼운 질감과 사각거리는 소리가 좋아서...
“언제 오냐. 수박 사서 기다리고 있어.사랑의 수위(水位)는 언제나 아슬아슬하고나는 거기 비친 윤슬들을 보며 자랐다.” 여름은 넘치는 계절이다. 새소리도 넘치고, 식물도 넘치고, 빛도 그늘도 땀도 꿈도 한껏 넘친다. 그러니 한껏 과장해도 괜찮다. 여름은 부사를 마음껏 쓰기 좋은 때. “너무너무 덥다!” “그치? 장난 아니지?” “나갔다가 3분 만에 흠뻑 젖었어.” 마주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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