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이 진녹색으로 변한 한여름의 어느 날, 동네 카페에서 동생과 마주 앉았다. “언니가 이 동네 온 지도 벌써 반년이 돼 가네. 이사 와서 가장 좋았던 때가 언제야?” 그러고 보니 한 해도 어느덧 반이 지났다. 흑백 필름처럼 스쳐가는 지난날 속에서 컬러 장면처럼 반짝거리는 순간을 정지시켜 봤다. 잠깐이지만 명징한 행복을 느낀 순간들이었고, 그곳엔 항상 사람이 있었다. 벌써...
마침내 선선한 공기와 함께 한가위가 다가오자 작년 추석의 기억이 보름달처럼 두둥실 떠올랐다. 난생처음 혼자 차례를 지낸 명절이라 잊을 수가 없다. ‘나 홀로 차례 지내기’는 아내가 결혼하고 처음으로 명절에 해외여행을 떠나면서 시작됐다. 나와 사는 동안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고 맏며느리로서 시댁의 대소사를 도맡아온 아내는 몇 년 전부터 제사 준비를 힘에 부쳐 했다. 40년 ...
엄마가 되고 나니 아이들에게 예쁘고 좋은 것만 주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얼마 전에 사돈어른이 보내주신 복숭아마저 그러했다. 아기 엉덩이처럼 봉긋한 모양에 발그레 물든 빛깔이 어찌나 곱던지 한참 감탄하며 바라봤다. 그러다 한 알을 집어 조심조심 흐르는 물에 닦았다. 그다음, 부드럽게 껍질을 벗겨 양쪽을 돔 모양으로 자르고 남는 부분은 직사각형으로 썰어 접시에 담았다....
내가 사는 집은 35층짜리 고층 아파트의 10층이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딱 한 대밖에 없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1층에서 탈 때도, 우리 층에서 탈 때도 엘리베이터가 오기까지는 언제나 한참 걸린다. 어느 때는 직전에 이용한 애꿎은 이웃들에게 불만의 화살이 돌아가기도 한다. 특히 택배 배송과 겹칠 때는 층마다 서는 엘리베이터에 짜증이 더 커진다. 내 앞으로 배달된 물건도...
매번 시내로 장을 보러 나가기 힘든 고령의 부모님은 작은 동네 마트를 애용하신다. 물건이 다양하고 싱싱한 시장보다야 못하겠지만 그런대로 큰 불만 없이 마트를 다니시는 엄마가 몇 개월 전엔 불평을 늘어놓으셨다. “마트에서 산 간고등어로 조림을 해 먹었는데 아무리 무를 넣어도 짜지 뭐니.” 좋아하시는 반찬을 다시 맛있게 해 드시도록 인터넷에서 순살 고등어를 주문해 보내드렸다....
동글동글 귀여운 생콩이 한때는 미움의 대상이었던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우리 집에 놀러 온 이모가 내게 건넨 말 한마디로 애꿎은 생콩만 내게 미운털이 박혔다. “우리 숙이는 꼭 생콩 같아.” 아마 사소한 일에도 잘 토라지는 조카에게 놀리듯 건넨 말이었을 텐데 난 온종일 기분이 언짢고 서운했다. 내가 평소에 좋아하고 동경하는 이모가 나를 비린내 나는 날콩에...
학창 시절이란 무릇 그립고 아름다운 때지만 내 경우는 다르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고등학교 모두 헌 교복을 입고 다닌 내겐 서러운 기억이 훨씬 많다. 교복 맞출 돈이 없어서 언니가 물려준 교복을 입고 중학생이 된 난 헐거운 교복을 걸친 내 모습이 볼품 없어 항상 부끄러웠다. 한번은 와이셔츠의 헤진 목깃을 감추려고 뒷 목에 반창고를 붙였는데 같은 반 남자애가 속옷이 삐져나온...
선선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던 작년 가을, 우리의 첫 아기가 태명대로 엄마 크게 고생시키지 않고 ‘순탄’하게 태어났다. 아기를 처음 품에 안은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마냥 기쁘기만 할 줄 알았는데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복받쳐 올랐다. ‘이 작고 귀한 생명을 내가 잘 키울 수 있을까? 이토록 큰 축복을 얻을 자격이 내게 있을까?’ 뜻밖에 몰아친 감정들로 조금 지친 몸과 마...
누군가 내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확신에 차 대답할 것이다. ‘또 다른 이의 사랑 속에서 치유 중입니다.’ 지난해 17년간 병마와 싸우던 남편을 하늘로 보내면서 크나큰 상실의 아픔을 겪었다.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처럼 무겁던 절망감도 지금은 견딜 만하다고 느껴진다. 남편이 떠난 뒤로 내게 많은 관심을 쏟아주는 손아래 ...
OTT 드라마 파친코가 큰 화제였던 2년 전 일이다. 얼마나 재밌는 드라마인지 나도 궁금했으나 원작을 먼저 접하고 싶어서 도서관으로 소설책을 빌리러 갔다. 공교롭게도 모두 대출 중이라 아쉬움만 안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아있었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막내딸에게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다 달라고 부탁하고 하교 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딸아이 역시 사서 선생님이 어린이 도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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