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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속에 서늘한 바람이 불 때, 야생 소나무 2021년 10월호
 
맘속에 서늘한 바람이 불 때, 야생 소나무

 

정재경(식물에세이스트) | 그림 김예빈

 

 

초등학교 입학 전후 즈음, 집으로 큰 박스가 두 개 배달되어 왔다. 저렇게 큰 박스 안엔 뭐가 들어 있을까 궁금해 죽을 것 같은데 엄마는 열지 말라 엄명을 내리셨다.


동생들과 상상에 빠졌다. ‘상자가 저렇게 큰 걸 보면 혹시 인형의 집일까? 아니면 책상? 재봉틀?’ 발로 탁탁 차 내용물을 짐작해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상자를 밀어봤지만 바위처럼 견고했다. 이 안엔 뭐가 들었기에 이렇게 무거운 건지 궁금증은 더해갔다. 혹시 흥부 네처럼 우리 집에도 금은보화가 가득한 보물 상자가 도착한 건 아닐까 설레는 상상도 해봤다. 뜯어보자고 아무리 졸라도 엄마는 끄떡도 하지 않으셨다.


우린 엄마가 언제 집을 비우시는지 알고 있었다. 저녁 준비를 위해 엄마가 장 보러 가려고 대문을 나서는 기척이 들림과 동시에 셋째와 막내는 현관 앞에 서서 망을 봤고, 난 둘째와 함께 상자를 뜯었다. 십자 형태로 엇갈리게 덮여 있던 상자는 어린아이의 힘으로는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아예 상자 위에 올라가 한 다리로 뚜껑을 누르고, 다른 한 다리로는 바닥을 지지하며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상자 뚜껑을 잡아당겼다. 마침내 상자가 열린 순간, 나는 “우와!” 하는 탄성을 질렀고, 동생들은 “에이…” 하며 실망했다.


책이었다. 《소공녀》 《15소년 표류기》 《레미제라블》 《걸리버 여행기》 《보물섬》 등 모두 읽어 보지 않은 이야기였다. 큰 상자 두 개가 모두 새 책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혹시 맨 윗면만 책인가 싶어 한 겹 들추고, 또 들춰 바닥까지 내려가 봤는데 전부 책인 걸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가장 먼저 뭐부터 읽을까 고르던 행복과 푸짐한 밥상처럼 다채로운 읽을거리에서 오는 그 포만감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난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새빨간 사과 한 알을 씻어 오른손에 들고 벽에 몸을 기댄 다음 무릎을 접어 그 위에 책을 올리고 사과를 아작 베어 물며 책장을 넘겼다. 책의 뚜껑을 열어 목차를 지나 머리말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글의 세계에 풍덩 빠져 헤어 나올 줄 몰랐다. 사과 한 알과 책 한 권이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했다. 지금도 사과 한 알과 책 한 권이면 충분하다.

 

피톤치드 향이 채워주는 생기
책을 탈고했거나 신경이 많이 쓰이던 프로젝트를 끝낸 다음 후련함이 쓸려가고 헛헛함이 밀려올 때면 어릴 적 좋아하던 것들을 떠올리곤 한다. 사과 한 알 들고 책 읽기, 바나나 맛 과자 먹기, 소나무 아래 걷기 등등. 그 중 하나를 골라 집중하며 천천히 몸을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샘이 고이듯 마음 주머니가 채워진다.


유년 시절의 여러 추억 중 아빠를 따라 뒷산에 오를 때가 기억나면 마음의 샘에 제일 맑은 물이 흘러넘친다. 숲에는 다른 나무도 많았지만 소나무가 특히 좋았다. 소나무 아래를 지날 때 바람결에 묻어온 향이 코끝을 스치면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때마다 숨을 크게 들이마셔 청정한 공기로 폐를 가득 채웠다. 소나무 잎은 사계절 늘 푸르렀다. 어른이 되면 소나무처럼 늘 푸르고 시원한 향을 뿜는 사람이 되어야지 생각했다. 소나무가 얼마나 좋았던지 애국가도 소나무가 등장하는 2절을 즐겨 불렀고, 콧노래를 부를 땐 “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네 빛”이라고 흥얼거렸다.


요즘도 마음이 왠지 텅 빈 느낌이 들면 운동복을 입고 소나무에게 간다. 뒷산 산책 코스를 따라 가볍게 달려 1km 즈음에 이르면 소나무가 잎을 드리우고 있는 녹음의 공간이 나타난다. 나뭇가지와 악수하며 솔잎 두 가닥을 빌린다. 잎을 세로로 접어 마스크를 조금 내리고 입안에 솔잎을 넣어 꼭꼭 씹는다. 그러고는 입 안 가득 퍼지는 솔 향을 천천히 음미한다. 산속 소나무 잎의 향은 진하면서도 부드럽다. 턱을 움직일 때마다 솔잎은 형체가 흐릿해지고 향이 희미해지지만 내 안으로 들어온 생기의 촉감은 점점 뚜렷해진다. 나만의 조깅 반환점을 돌아 달려오면 어느새 충만해진 마음 속 기운이 느껴진다.


솔 향은 피톤치드이다. 피톤치드의 어원은 ‘식물(phyton)’과 ‘죽이다(cide)’의 합성어로, 식물이 뿜어내 주위의 미생물 등을 사멸시키는 물질을 총칭한다. 실제로 피톤치드의 혼합물은 30초 안에 코로나 바이러스를 99.99% 사멸시킨다는 뉴스도 있었다. 피톤치드는 타감(他感) 물질이기도 해서 솔잎 위엔 잡초가 자라지 않는다. 미생물과 잡초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피톤치드지만 사람에겐 이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숲 속 소나무는 이토록 유익한 물질을 아낌없이 나눠준다.


꼭 집에서 살아야 반려식물일까. 주변 공원이나 산책로를 다니다가 마음을 주게 된 나무도 충분히 위로와 기쁨의 존재가 된다. 집에서 키우는 식물은 때가 되면 물도 주고, 비료도 주고, 벌레도 잡고, 분갈이도 해줘야 하지만 야생 소나무는 유지 관리의 부담이 없어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대하게 된다. 무엇보다 산에서 만나는 소나무에겐 마음껏 자라는 자유에서 오는 풍요로움이 느껴진다.


집에도, 사무실에도 식물이 가득하지만 마음이 헛헛할 땐 운동화를 챙겨 신고 산에 오른다. 피톤치드 향을 아낌없이 뿜어주는 소나무가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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