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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샘터작가 2017년 6월호
 
이달의 샘터작가

l 옛정이 담긴 축의금 l


 

“나 기억 안 나요? 배부장이에요.” ‘배부장’이라는 호칭을 듣고서야 집으로 찾아온 후줄근한 행색의 노인이 누군지 기억났다. 오래 전 공사현장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였다. 다른 동료들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데도 잡역부라는 이유로 ‘배 씨’라고 불리던 그가 딱해 반장인 나는 배가 불룩 나온 그에게 ‘배부장’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8년을 함께 일하며 우린 친형제 이상으로 서로 아끼며 지냈다.


하지만 내가 회사를 그만둔 뒤론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폐지나 고철을 줍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뿐 어찌 지내나 늘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20년 만에 찾아온 그에게 “배부장님 맞네, 맞아! 이게 얼마만이에요. 들어오세요” 하며 팔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그는 “일이 안 끝나서 가봐야 해요. 이것만 전해주려고요”라며 외투 속에서 흰 봉투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딸 송이 혼인했다면서요? 늦었지만 축하해요.”


그제야 딸의 결혼식을 앞두고 옛 동료들에게 연락했던 날이 떠올랐다. 배부장은 전화번호가 바뀌어 아쉽게도 통화를 못했는데 딸이 결혼한 지 두 달이 지난 오늘 배부장은 축의금을 직접 갖고 온 것이었다.


그는 “소식은 전해 들었는데 먹고살기가 바빠서 그만…. 늦어서 미안해요”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돌아섰다. “배부장님! 잠깐만요” 하고 불러도 쑥스럽다는 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옛정을 잊지 않고 일부러 집에까지 찾아온 그에게 나는 마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가 준 봉투에는 낡은 천 원짜리 지폐 50장이 들어 있었다. 지폐 뭉치에서 풍기는 비릿한 쇳내에 가슴이 뭉클해져 핑그르르 눈물이 돌았다. 눈을 감자 땀으로 얼룩진 배부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l 정이식

2009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동화부문에서 당선된 후 동화를 쓰고 있습니다. 공사장 일을 그만 두고 폐지 수거하는 덤프트럭을 운전하고 있지만 동심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故 정채봉 선생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멋진 동화를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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