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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대신 젖병을 든 남자 2018년 4월호
 
마이크 대신 젖병을 든 남자

 



아내가 출근을 하고 아이와 단둘이 남은 아침, 아이는 한참을 놀다가 어느새 내 품에서 잠이 들었다. 이 시간에 푹 자지 못하면 아이의 컨디션이 나빠질 것이고, 작은 것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쉽게 울음을 터트릴 것이다.


오늘 하루의 평화가 이 순간에 달려있으니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다. 아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집을 치우고 분유와 기저귀까지 준비해두면 그제야 내게도 잠시나마 평화로운 시간이 주어진다.


행복하기 위해 선택한 육아휴직이었다. 활발하게 방송 활동을 하고, PD 연합회에서 주는 ‘TV 진행자 상’까지 받으면서 승승장구하던 그때,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 과정에서 뇌 속에 무언가 보인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MRI를 찍으며, 살면서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만약 내일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딸을 만나기 두 달 전,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지자 삶의 기준이 명확해졌다. 다행히 검사결과 아무 이상은 없었지만 그 일을 계기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육아휴직을 갖기로 결심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직장에서는 기반을 탄탄하게 다져나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남성 육아휴직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 끝에 내린 우리의 선택은 바로 ‘지금’이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는 건 어리석은 생각 같았다. 모든 것이 처음인 아이 곁을 지키며 함께 차근차근 발맞추어 나가고 싶었다.


부모의 자리는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환호도 없었고, 조명이 나 카메라, 멋진 옷도 없었다. 내 곁에는 나를 바라보며 온전히 아빠에게 의지하는 아이뿐이었다. 힘들 때도 많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아이와 사투를 벌이며 회사 생활할 때보다 더 고단한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서툰 솜씨로 타준 분유를 꿀꺽꿀꺽 먹고 트림까지 시원스럽게 한 뒤 사랑스런 미소를 짓는 아이를 볼 때면 모든 시름이 잊혔다. 그리고 진심으로 행복했다.


무엇보다 그 시간만큼은 어느 때보다 자연스럽고 솔직했다. ‘아나운서 김한별’이 아닌 한 아이의 아빠로서의 내가 참 좋았다. 아나운서일 때는 멋있는 헤어스타일과 화장으로 외모를 꾸몄고, 단점은 감추고 장점을 살리는 옷을 입었다. 하지만 모두 한때였다. 화려한 무대에서 내려오면 모든 게 순식간에 사라지곤 했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몰려오는 허무함이 때로는 참 힘들었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실을 담보 잡힌 듯한 느낌이 편치 않았다.


아이와 함께하는 지금은 그렇지 않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에 분유가 묻은 옷을 입고 있어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참 나답다. 그동안은 내 모습을 보기 위해 거울을 너무 많이 보고 살았던 것 같다. 이제는 그 시간에 아이와 아내의 얼굴을 보고, 그들의 얘기에 귀 기울이며 웃음 짓는 나를 발견한다.


‘아, 행복하다.’ 아무 생각 없이 아이와 아내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내뱉게 되는 말이다. 아이를 키우며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무엇인지 새삼 깨달아가는 중이다. 이젠 내 몸을 돌보는 것보다 아이를 챙기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내 식사는 아이를 안고 대충 해결해도, 아이의 식사는 시간과 온도, 자세와 타이밍 모두를 생각해서 성심성의껏 준비하는 내 모습에 아내도 안심하고 회사로 향한다.


앞으로의 내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먼 훗날 지금의 우리를, 지금의 나를 돌아봤을 때 분명 참 행복했다라고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난 지금의 나에게 ‘육아휴직은 참 잘한 선택이었다’고 칭찬할 것이다. 그렇게 소중한 나의, 우리의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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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별

2010년 KBS 36기 공채 아나운서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TV와 라디오에서 보여준 능숙한 진행 솜씨로 2016년 한국 PD 연합회에서 수여하는 TV 부문 진행자 상을 받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시기에 육아휴직을 택해 주위를 놀라게 했습니다. 얼마 전 아빠로서 아이를 키우며 느낀 기쁨과 애환을 담은 에세이집 《라테파파》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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