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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효자는 웁니다 2018년 6월호
 
불효자는 웁니다

 

매주 금요일이면 나는 수업을 끝내기 무섭게 서둘러 학교 문을 나선다. 어느 반 담임보다 빠르게 종례를 마치고 곧장 수원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날도 아침에 짐 가방을 들고 출근했기에 집에 다시 들르지 않고 바로 고향 경북 영주로 가는 막차에 오를 수 있었다.


다음 날, 고향에 있는 종합병원 정신건강과에 입원한 아버지에게 드리려 보신탕을 산 다음 병원으로 들어섰다. 병원 밥이 변변찮을 것 같아 나름대로 고단백질 음식을 준비한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매주 아버지를 찾아뵙고 보신탕을 사다 드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럴 때마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내가 죄인임을 각인시켜 주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오늘날 내가 어른이 되어 사람 구실하며 살 수 있었는데, 나는 사그라진 아버지를 병원에 모실 수밖에 없는 불효자였다.


재작년 8월, 폭력성 치매를 앓게 된 아버지를 고향 종합병원의 정신병동에 입원시켰다. 집에서 모셔야 했지만 수시로 벌어지는 폭력을 어머니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에게 창살이 쳐진 정신병동에 갇히는 고통을 안겨주고 말았다.


아버지는 내가 사간 보신탕을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맛있게 드셨다. 그러고는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줄 아시고 아기처럼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셨다. 그러나 이런 행복도 잠시 잠깐일 뿐이었다. “아버지, 다음 주 토요일에 또 올게요.” 매번 똑같은 말로 아버지를 달래놓고 병원 문을 나섰다.


병원 출입 철문이 ‘꽝’ 하고 내려지고 돌아서면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의 김 첨지처럼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몸져누운 아내에게 설렁탕을 사다 준 그와 병든 아버지에게 보신탕을 사다 드리는 내 모습이 묘하게 닮았다.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는 이 병원을 우리 고향이라고 하다가 어느 날에는 학교라고 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날이 반복되었다. ‘내가 아버지를 모시기 힘들어서 여기에 데려놓은 줄 알고 계실까?’ 주말마다 아버지를 마주할 때면 괴로웠다. 수원으로 돌아와서도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학교에서도 정신 줄을 놓고 허둥대기 일쑤였다. 나는 이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았다. 내가 직접 아버지를 간병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병원비와 아이들 등록금 때문에 일을 그만둘 수 없는 현실이라고 합리화하곤 했다. 마음 한편으로는 이런 내가 너무 미웠다.


그렇게 죄를 더 짓고 나서야 고향집 가까운 공기 좋은 요양원으로 아버지를 옮겨드렸다. 하지만 공기 좋은 건 다리가 온전한 사람이나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아버지는 혼자 몸으로 밖에 나올 수 없을 만큼 쇠약해진 상태였기에 이전 병원과 별반 다른 점을 느끼지 못하셨을 터였다. 아버지의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더욱이 요양보호사들에게까지 폭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요양원 관계자로부터 전화가 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작은 선물을 사 들고 가서 머리를 조아렸다. “사정을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아버지께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최근 아버지의 상태가 의사소통이 불가할 정도로 나빠졌다. 뇌졸중이 2차로 발병한 것이다. 그 바람에 아버지는 아들과의 대화의 문을 완전히 닫고 말았다.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면서 면벽수양에 들어가셨는지 득도한 스님처럼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나를 보고도 어떤 눈짓도 보내지 않으신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노라면 어쩌면 내 죄가 많이 쌓여서 아버지를 이 지경으로 몰고 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든다. 자꾸 내 탓인 것 같아 더 고통스럽기만 하다.


뒤늦게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이 불효자의 눈물을 아버지께서 알아채고 하루빨리 쾌차하시길 오늘도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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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대

경북 영주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아버지, 어머니의 땀으로 교사가 되었습니다. 현재 수원북중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하며 틈틈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한국교육신문 교원문학상, 공무원문예대전에 입상했습니다. 작년에는 《월간문학》에 시조 <물빛의 화법>으로 등단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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