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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가 남긴 선물 2018년 12월호
 
무더위가 남긴 선물

 

 

올여름은 우리나라가 기상 관측을 시작한 1907년 이후 사상 최악의 무더위였다고 한다. 연일 열대야가 계속되자 아내와 나는 거실에 있는 에어컨 앞에 잠자리를 잡았다. 전기세 걱정에 에어컨 사용을 꺼리시던 구순이 넘은 어머니도 못 이기는 척 거실에 이불을 깔으셨다. 곧이어 딸아이도 자기 방이 너무 덥다며 베개를 들고 나왔다. 111년 만의 더위에 모처럼 삼대가 한곳에 모여 자게 된 것이다.


“선풍기, 냉장고도 없이 우물물로 등목을 하며 더위를 쫓던 시절에 비하면 여름 같지도 않구나”라는 어머니의 일장연설이 끝나갈 무렵, 딸아이는 다리가 아프다며 내게 두 발을 내밀었다. 모처럼 아빠에게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나 보다.


딸아이의 종아리를 주무르자 단단한 근육이 느껴졌다. 매일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출퇴근하느라 다리에 알이 밴 모양이었다. 10여 분 동안 꼼꼼하게 마사지 해주었더니 딸아이는 피로가 다 풀리는 것 같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전철에서 1시간 내내 서 있어서 다리가 아파. 근데 더 견딜 수 없는 게 있어….” 딸아이는 그제야 만원 전철의 성추행범 얘기를 꺼낸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정 무렵 지쳐 귀가한 딸아이에게 격려는커녕 왜 이렇게 늦었냐며 야단을 치지 않았던가. 새벽같이 출근해 밤늦게까지 야근을 할 때가 많은 딸아이와 이야기 나눌 시간이 별로 없다 보니 못난 아비는 딸아이의 고충을 알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딸아이는 내게 두 다리를 맡긴 채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나는 딸아이가 깰까 봐 조심조심 손을 떼며 속삭였다. “내일도 다리 주물러줄게. 힘내!” 무더위마저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아름답고 뜨거운 여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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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길

서울가정법원 가사조정위원으로 이혼 사건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사랑했지만 싸늘하게 돌아서는 이혼 부부들을 지켜보며 가슴이 시리기도 하지만, 반면교사로 아내를 더욱 사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수필집 《행복을 굽는 아버지》를 펴냈고 현재 《이혼의 기술》이라는 책을 집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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