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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보다 사람이 먼저인 더블린 2019년 11월호
 
차보다 사람이 먼저인 더블린

아일랜드 더블린에 막 도착했을 때 나를 맞아준 이는 홈스테이 주인아저씨였다. 아저씨가 몰고온 현대자동차의 경차 외관에는 각종 홍보 문구가 잔뜩 붙어 있었다. 조수석에 앉자마자 아저씨는 나에게 “발밑에 브레이크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일러줬다.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니 운전 연습 강사라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그가 신기했다.


그러니까 그는 연습용 차량을 몰고 나온 것이었다. 회사 소유의 차를 개인적으로 써도 되나 싶었지만, 본인 차량이라고 해서 더 놀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일랜드는 운전면허 연수 기간이 상당히 길고 까다로워 운전 연습 강사가 개인 연습용 차량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10만 킬로미터 이상 주행해야 숙련된 운전자로 인정돼 그때가 돼서야 각종 제한이 풀리는 만큼 도로 위 적지 않은 운전자는 연수자(Learner) 혹은 초심자(Novice) 단계였다.


한번은 아일랜드에서 면허를 취득하기 위해 알아보다가 복잡한 절차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아일랜드에서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서는 적어도 2년 반이 걸린다. 물론 그동안 아예 운전을 못 하는 건 아니다.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나면 바로 연수 단계로 들어가는데 이때부터 운전을 할 수 있긴 하다. 단 숙련된 운전자나 강사를 대동해야만 한다. 이런 식으로 최소 6개월간 운전을 하면 주행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합격하면 초심자 단계가 된다. 그때부터는 숙련자를 대동하지 않아도 운전이 가능하고 고속도로를 달릴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정식 운전면허를 발급받은 단계는 아니다. 정식 운전면허증은 초심자 단계를 밟은 지 2년이 지나야 받을 수 있다.


나는 한국에서 1종 보통면허를 딸 때 실기에서 4번, 도로 주행에서 3번 떨어진 전적이 있다. 불합격 통보를 받을 때면 학기말고사 성적표를 확인할 때보다 더한 쓰라림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한국의 운전면허 시스템은 아일랜드에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연수자와 초심자는 반드시 차량 앞뒤에 각각 L과 N이 라고 적힌 플레이트를 붙여야만 한다. 아직 정식 면허증이 없으니 서로 안전 운전을 하고 양보를 하자는 의미다. 정식 면허를 받기 위한 절차가 길다 보니 이 플레이트가 없는 차량을 보기 힘들다.


그 때문인지 도로 위 차량은 느리게 달린다. 아주 가끔 시속 80~100킬로미터 수준으로 달리는 차량이 지나가기도 하지만 대체로 모든 운전자가 보행자를 우선한다. 더블린에 와서 가장 놀랐던 것 가운데 하나는 자동차가 먼저 가도 되는 상황임에도 보행자가 길을 건너려고 하면 항상 멈춰 선다는 점이다. 나 역시 짧은 2차선 도로를 건널 때 앞에 오던 차량이 미리 멈춰선 나에게 먼저 지나가라고 손짓을 해준 경우를 많이 만났다. 한국 같았으면 나 몰라라 하며 쌩 쌩 달릴 차량이 멈춰서니까 참 고마웠다. 정치 슬로건으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사람이 먼저다’란 문구가 더블린 도로 위에선 정말로 지켜지고 있었다.


교통법 자체도 사람이 먼저다. 보행자의 무단횡단으로 교통사고가 났다고 해도 사고 책임은 운전자에게 가중된다. 그래서인지 더블린 시내에서는 무단 횡단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도로 폭 자체가 짧기도 하고 신호가 빨리 돌아오지 않아서 대부분 보행자는 차량이 오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기 일쑤다. 처음에는 이 문화에 상당히 당황했지만, 어느새 현지 사람들 사이에 합류해 능숙하게 무단 횡단을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곤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또 하나 재미있는 교통법규가 있다. 이곳은 운전자가 보행자에게 물을 튀기다 경찰에 적발되면 바로 구치소행이다. 개인적으로 이 법이 가장 마음에 든다. 비 오는 날에는 다른 날보다 더 안전운행할 것을 상기시켜주는 법이라고 생각 한다. 덕분에 한국 도심에서 시속 80킬로미터로 달리면서도 액셀에 발이 가던 내가 이제는 모두가 천천히 달리는 미덕을 생각하게 되었다.


조은애


한국에서 5년간 기자 생활을 하다가 아일랜드로 떠났습니다. 현재 더블린의 한 IT회 사에 다니고 있으며 국내 일간지 <디지털타임스>에 격주로 ‘유로 인사이트’ 칼럼을 쓰며 유럽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브런치에 더블린에서 겪는 일상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 관한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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