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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한 사람
가족의 빈자리를 채워준 브루스 부부 2020년 3월호
 
가족의 빈자리를 채워준 브루스 부부

 

가족과 떨어져 뉴질랜드로 유학을 떠났을 때 내 나이는 겨우 열여섯이었다. 아직은 가족의 품이 더 좋을 나이에 혼자 덩그러니 머나먼 나라에 떨어지니 막막하고 무서웠다. 하지만 언어도, 풍경도, 음식도 모든 것이 생소한 뉴질랜드에서 사춘기를 무사히 보내고 대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서 만난 브루스 부부 덕분이었다.


뉴질랜드에서 처음부터 좋은 친구를 만난 나는 참으로 행운아였다. 홈스테이로 머물 집에서 나를 맞아준 친구 캣(Kat)은 학교에 귀여운 한국인 친구가 온다는 소식이 전해져 모두 기다리고 있다며 기쁘게 환영해주었다. 영어가 서툰 나를 위해 천천히 말을 이어가고 내가 심심하지 않도록 먼저 대화를 걸어주는 캣이 있어 뉴질랜드가 조금은 편하게 느껴졌다.


브루스 부부와의 인연도 캣이 아니었다면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인영, 우리 같이 교회에 가지 않을래? 교회에 가면 맛있는 간식도 주고 친구들도 많거든!” 한국에서도 교회에 다녔던 터라 캣의 제안이 반가웠던 나는 동네 작은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그림처럼 예쁜 그 교회에서 브루스 부부를 처음 만났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인자한 웃음이 빛났던 할머니 할아버지는 꼭 산타클로스 부부 같았다. 부부는 어린 나이에 혼자 낯선 나라에 온 내가 안쓰러웠는지 첫 만남 이후로 나를 친손녀처럼 챙겨주었다. 주말마다 나를 데리고 다니며 뉴질랜드 남섬의 명소들을 구경시켜주었고, 집으로 초대해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주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주말만 되면 어김없이 잊지 않고 나를 챙겨주는 브루스 부부가 참으로 감사했다. 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지낸 덕분에 내 영어실력은 부쩍 늘었고 살도 포동포동하게 올랐다. 한국에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셨다면 뉴질랜드에는 브루스 부부가 있어 외롭지 않았다.


한 식구처럼 끈끈해진 우리의 인연은 내가 도시로 대학교를 간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우리에겐 해당되지 않았다. 멀리 떨어져 지내도 변함없이 챙겨주는 부부에게서 나는 가족의 정을 느꼈다. “밥은 먹었니?” “요즘에는 별 일 없이 잘 지내니?” “시골 한 번 내려오면 좋겠구나.”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인사들이지만 이런 소소한 안부야말로 우리네 할머니 할아버지가 늘 하시는 말이 아닌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부부의 다정한 인사들은 나의 짙은 향수를 달래주기에 충분히 따뜻했다. 전화통화로만 그치지 않고 나는 한국에 있는 식구들이 그리워질 때마다 부부의 집에 가서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도 보고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도 나누며 내 집처럼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나를 아껴주는 또 다른 가족이 생겼다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했다.


그렇게 오래오래 내 곁에 계실 줄만 알았건만, 어느 날 할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할머니의 부음은 믿기 힘든 충격이었다. 친가족이 세상을 떠난 것처럼 나는 몇날 며칠을 눈물로 지새우며 슬픔에 빠져 지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의 연세가 많기도 했지만 건강이 썩 좋은 편은 아니셨던 것 같아 마음이 더 아프다. 성치 않은 몸으로 몇 년이나 나를 위해 정성껏 밥을 차려주시고, 나들이를 같이 다녀주셨던 할머니를 왜 나는 더 살뜰히 챙겨드리지 못했을까. 내가 편하자고 할머니를 힘들게 한 건 아닌지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할머니는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할머니 몫까지 할아버지가 더 깊이 나를 사랑해주고 계신다. 귀국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올해로 90세가 되신 할아버지는 잊지 않고 전화를 걸어 “요즘 바쁘니? 건강 잘 챙겨라. 늘 축복한다” 말씀하신다. 다정한 그 음성을 듣고 있으면 할아버지가 더 보고 싶어진다. 브루스 부부가 준 무한한 사랑을 나는 기꺼이 다른 누군가에게 나누어줄 생각이다. 상대방에게 친절과 선의를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게 해준 그분들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박인영


배우 겸 방송인이자 그룹 슈퍼주니어의 리더 이특의 누나로 알려졌습니다. 《발리에서 요가하며 한 달 사는 이야기》의 저자이자 요가 및 다이어트핏 강사로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가꾸는 법을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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