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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초월하는 바이러스의 위력 2020년 4월호
 
시대를 초월하는 바이러스의 위력

1933년 1월, 그해 겨울은 따뜻했다. 십 수 년 만에 보는 이상난동(異常暖冬)이라 했다. 겨울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사람들을 에워싼 것은 한파 대신 질병의 공포였다. 복 많이 받으라는 말 대신 밤새 안녕하셨냐가 새해인사였을 만큼 죽어나가는 이가 매일 늘어났다.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었다.


장티푸스와 천연두 같은 재래종 질환들도 만연했지만 유독 위협적인 질병은 유행성 감기와 폐렴으로 대표되는 호흡기 질환이었다. 옥인동에 위치한 격리 병원에 이송된 환자가 1월 상순에 벌써 43명에 이르렀다. 당시 서울 인구가 30만 명대였으니 현재와 비율을 대비하여 본다면 수용환자 수가 대략 1,000명 이상 되었던 셈이다. 신문은 ‘금년 감기는 매우 악성이라 폐렴과 중이염으로 번진다. 발열과 기침, 그리고 가쁜 숨은 폐렴의 조짐. 이럴 때는 따뜻한 물수건으로 가슴을 찜질하는 것이 좋다’고 전했다.


1월 내내 수그러들지 않던 신종 호흡기 질환은 2월이 되자 더욱 확산되었다. 전문가들은 저마다 “보건 위생 상태는 점점 좋아지는데 갈수록 전염병이 심해져가는 것은 대체 어인 일인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다”라고 걱정을 토로하면서 한 가지 의견에 모두가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 독감이 아직도 죽지 아니하고 틈만 나면 고개를 드는 것”이라고.


‘그 독감’이란 15년 전 처음 출현했던 신종 유행성 독감을 일컫는 것이었다. 일명 ‘스페인독감’이라는 이름으로 1918년 한국에 창궐한 이 전염병은 무려 14만 명에 육박하는 사망자를 내었다. 전체 인구의 40% 이상이 감염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부터 서양에서 발원하여 전 세계로 퍼져 최소 2천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인플루엔자 A형 바이러스의 변형 바이러스에 의한 신종 호흡기 전염병이었다. 이전에도 이런저런 전염병은 늘 있어왔고 크게 유행하는 해에는 수백 명의 발병자와 100명 내외의 사망자가 발생하곤 했는데, 스페인독감을 겪은 후부터는 사망자가 천 명 단위로 뛰어올랐다.


1918년과 1919년 두 해를 휩쓴 스페인독감이 물러갔다고 여길 때쯤인 1920년, 서울에서 발생한 유사 전염병의 공식 감염자만 1,340명이었다. 사망자는 무려 983명. 치사율 73%의 공포가 한반도를 뒤덮었다. 1910년대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이는 전염병의 새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1927년부터 줄곧 1,000명 이상의 감염자 추세를 보이던 양상은 1930년대 들어서도 호전되지 않았다. “위생시설은 해를 거듭하여 새로워지고 관련 예산도 늘어가는 대도시 서울에서 이처럼 전염병이 자꾸 느는 것은 어인 일인가. 그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는 전문가들의 탄식이 이어졌다. 새 호흡기병이 한 번 전국을 휩쓴 이후 근절되지 않은 채 매년 겨울이면 주기적으로 유행하기를 반복한다는 진단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신종 전염병 출현과 확산의 풍경은 그 후로도 반복되며 21세기를 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위생환경과 의술의 발달, 평균수명 등 모든 면에서 삶의 질이 크게 호전된 오늘날이지만 전염에 대한 공포는 어느 때 못지않게 높다.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는 현상을 판데믹(Pandemic)이라 부른다. 발음이 유사한 판도라(Pandora)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호기심에 못 이겨 스스로 불행의 상자를 열고야 마는 인간의 모습을 상상하면 어쩌면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간 본성에 깃든 어두운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신종 바이러스가 아무쪼록 사람의 심성까지 오염시키지 않기를, 그리하여 사람 사이의 관계가 더 삭막해진 이때에 부디 인간 본연의 고운 심성만큼은 꿋꿋이 살아 남기를 기원할 뿐이다.


박윤석(역사저술가)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사에서 20여 년간 기자로 일했습니다. 《경성 모던타임스》를 통해 한국의 근대사를 조망한 이래 역사강의를 하며 한국 근현대사에 새로운 시각을 부여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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