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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부엌 수업
종가의 비법과 넉넉한 인심으로 차린 한상 2020년 7월호
 
종가의 비법과 넉넉한 인심으로 차린 한상

 

“첫째 딸은 살림밑천이다”라는 말도 전남 보성 웅치면 한씨 댁에서는 예외였다. 청주 한 씨 종갓집의 7남매 중 넷째로, 딸로서는 둘째였던 한평임 할머니는 언니 대신 어머니의 야무진 손맛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내림 음식에 그녀의 아이디어가 더해진 맛깔스러운 요리가 무궁무진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자신 있는 건 밥 한 그릇 뚝딱 비우게 하는 밥도둑, 쪽파꽃게무침이다.


“어머니가 천석꾼 부잣집에서 태어나셨어요.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귀하게 사셨을 것 같은데, 음식 솜씨가 좋으셨어요. 종갓집으로 시집 와 1년에 아홉 번이나 되는 제사상을 손수 차리셨는데 살림 거드는 일꾼들이 많았어도 맛 내는 건 꼭 어머니 손을 거쳐야 했어요.”


서울 서초동에 살고 있는 한평임(76) 할머니의 고향은 전남 보성이다. 종갓집에서 나고 자라며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내림 음식과 부잣집 출신의 어머니 요리 솜씨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 덕에 할머니는 한 가지 재료를 봐도 수십 가지 요리법이 절로 떠오르고 철마다 건강한 제철 재료를 그냥 넘길 수 없어 항상 바쁘게 손을 놀린다. 김치만 하더라도 상추김치, 돼지감자김치 등 수십여 가지나 된다. 특히 초 여름까지는 쪽파김치를 빼놓지 않고 밥상에 올려 입맛을 돋운다. 쪽파를 이용한 비장의 음식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쪽파꽃게무침이다.

 


“저는 게무침에 양파나 대파를 안 써요. 양파나 대파에서 수분이 많이 나오거든요. 국물이 생기면 식감이 덜하고 육안으로도 맛이 없어 보여서 수분이 덜 나오는 쪽파를 사용해요.”


식감을 중요시하는 그녀만의 비법이 한 가지 더 있다면 생물이 아닌 냉동꽃게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금세 흐물흐물해지는 꽃게살을 냉동실에 넣고 얼리면 좀 더 단단해져 식감이 좋아진다는 게 그녀의 지론. 얼린 꽃게에 갖가지 양념과 쪽파를 매콤하게 버무리면 아삭한 쪽파와 탱글탱글한 게살이 일품인 쪽파꽃게무침이 완성된다.


밥도둑 꽃게무침만으로도 밥 한 그릇 뚝딱이건만 밥상에는 쉬지 않고 찬들이 올라온다. 고사리를 밑에 깔고 쪄내 향이 은은하게 밴 고사리조기찜, 멸치 대신 삶은 오징어를 넣어 씹는 맛이 좋은 오징어꽈리고추무침, 연근을 갈아 동그랑땡처럼 부친 연근전 등 그 면면을 보면 하나같이 범상치 않다. 조금씩 조리법을 달리하거나 색다른 조합으로 완성한 음식이어서 젓가락도 대보기 전에 그녀의 요리 내공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넉넉한 인심이 더해져 잔칫날을 방불케 하는 화려하고 푸짐한 한상이 차려진다.


 

 

요리면 요리, 살림이면 살림!


어릴 적부터 종갓집 큰살림을 보고 자라서인지 한평임 할머니는 음식을 했다 하면 차고 넘치기 일쑤다. 하지만 한 번도 음식을 버리는 일이 없다. 양껏 해서 가까이 사는 친구들에게 나눠 주고 자식들 먹이는 것이 그녀의 행복이다. 매년 김장김치도 100kg 이상을 담가 자식들에게 보낸다. 특히 그녀의 김치를 좋아하는 건 둘째 며느리다.


“며느리는 밖에서 일하고 들어올 때 어서 집에 가서 어머니 김치에 밥 먹을 생각하면 발걸음이 빨라진대요. 그러니 반찬 해주는 게 즐겁지요. 팔꿈치와 손가락이 아파 좀 쉬려고 하다가도 봄에는 파김치, 여름에는 열무김치, 가을에는 포기김치, 겨울에는 동치미를 담그느라 쉴 틈이 없어요.”


부엌을 떠날 줄 모르는 그녀의 냉장고에는 각양각색 김치와 더불어 다양한 식재료가 떨어질 날이 없다. 삼남매 출가시키고 일흔이 넘은 나이에 세간을 줄여 아담한 빌라로 이사를 왔건만 냉장고가 석 대나 된다. 냉장고에는 모두 양념과 반찬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원래 이 냉장고에 칸막이가 3개밖에 없었어요. 사이사이 공간이 애매하게 남더라고요. 그래서 유리로 칸막이를 더 짜서 끼워 넣었어요. 그러면 버리는 공간 하나도 없이 음식을 넣을 수 있어요.”


냉장고 하나만 보더라도 버리는 공간 없이 알뜰하게 이용하는 살림구단의 면모가 느껴진다. 게다가 장식장, 싱크대 등 집안 구석구석 질서정연하게 살림살이들이 잘 정리되어 있는 게 요즘 생겨난 직업 중 하나인 정리수납전문가 못지않다.


그녀가 쌓아온 생활의 지혜는 집안 곳곳에 녹아 있다. 싱크대에는 커튼을 달아 요리가 끝난 뒤 너저분한 조리도구들이 안 보이게끔 깔끔하게 커튼을 쳐놓고, 벽에 세워둔 교자상이 자꾸 쓰러지기에 벽돌을 달아 고정시켜 주었다.


손도 야무지고 머리도 총명했기에 그녀는 가끔 대학에 가서 공부를 더 했으면 어땠을까 하고 궁금해질 때가 있다. 모두가 역사의 풍랑을 세차게 받아내던 그 시절, 아버지가 만주에서 준비하던 무쇠솥 사업이 무산되자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집안을 살피느라 대학 진학을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일흔을 훌쩍 넘어 잠시 옛 생각에 잠기지만 지나온 세월을 아쉬워하는 건 결코 아니다. 잘 자라준 삼 남매와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주들이 있어 감사할 뿐이다. 자식들 다 키워 놓고 복지관에서 라인댄스, 한국무용, 에어로빅 등의 취미생활도 즐기고 친구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는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하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복이 참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것 같아요. 힘든 일도 다 끝이 있기 마련이다 생각하고 연연하지 않으려 해요. 그래서 항상 행복해요.”


매사에 긍정적인 한평임 할머니가 특히 좋아하는 말이 있다. ‘오늘은 당신에게 남아있는 생의 첫날이다’. 강산이 일곱 번도 넘게 변하는 시간을 살아왔지만 그녀는 여전히 새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몸은 예전 같지 않아도 마음만은 생의 첫날이니 기쁘게 요리를 하고 함께 나누어 먹는다. 오늘도 맛있는 냄새가 진동하는 서초동 골목길, 그 진원지가 어디인지 알 것 같다


 


 

글 김윤미 기자 사진 한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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