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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한 사람
인연의 끈을 다시 잇고 싶은 친구 2020년 8월호
 
인연의 끈을 다시 잇고 싶은 친구

요즘처럼 무더웠던 16년 전 여름, 뉴질랜드로 유학을 떠났다가 귀국한 나는 중학교에 편입했다. 그리 오래 한국을 떠나있었던 것도 아닌데 모든 풍경들이 참 어색했다. 학교 건물, 교복, 친구들 모두 낯설기만 해서 하굣길에 삼삼오오 모여 걸어가는 학우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내게도 곧 좋은 친구가 생기면 좋겠다’고 되뇌곤 했다.'


내 마음속 바람을 하늘에서 들어주셨던 걸까? 여느 날과 같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엄마 친구가 운영하시는 공부방으로 향하던 길에 나와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과 함께 걷게 되었다.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우린 여중생 특유의 호기심과 붙임성을 발휘해 짧은 대화를 나누면서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큰 키에 시원스런 이목구비를 지녔던 그 친구는 겉으로 봐도 똑똑하고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금세 호감이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는 지난 학기에 전교 1등을 한 것은 물론 내 예상대로 똘똘하고 예의가 발라 선생님이나 학부모, 친구들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한 모범생이었다. 우연히 같이 길을 걷다가 친구가 된 것도 신기한데 우리 사이에는 또 하나의 숨겨진 인연이 있었다. 알고 보니 엄마들끼리 예전에 친분 있는 관계였던 것. 그동안 보이지 않던 인연의 끈으로 연결돼 있었다고 생각하니 우리 사이가 더욱 각별히 느껴졌다. 누군가 몇 년 지기 친구냐고 물으면 우리는 망설임 없이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친구였어요”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그렇게 귀국 선물처럼 찾아온 그녀와의 우정은 갈수록 깊어졌다. 함께 공부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험이 끝나면 항상 같이 놀러 다녔다. 여름방학에 어른들과 다 같이 해변으로 휴가를 다녀오기도 했고 서점, 노래방, 영화, 미술관 등 다양한 장소를 다니며 추억을 쌓아갔다. 그녀는 나와 달리 매우 쾌활한 친구였다. 티 없이 밝고 맑아 내게 드리워진 그늘을 모두 걷어주는 듯했다. 당시 친구와 나의 집안 사정은 아주 상반되었는데 유복한 그녀의 가정과 달리 우리 집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는 배경을 싹 걷어내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었고, 덕분에 그녀에게만은 나도 온전하게 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다.


친구와 쌓았던 추억들을 반추해보면 뚜렷한 에피소드는 기억나지 않는다. 늘 붙어 다니는 사이였는데 왜 이렇다 할 일화가 떠오르지 않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하다가 그 답을 찾았다. 나는 친구를 특별한 이유가 있어 좋아한 것이 아니었다. 거창한 말을 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다독여주는 듯한 따뜻한 눈빛,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던 표정, 생기 흐르는 말투…. 그녀는 내게 그 자체로 위안이 되는 친구였다.;


중학교 내내 친자매처럼 지내다가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한 우리는 학업과 실기 때문에 바빠져 전처럼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한결 같이 내게 힘이 되는 친구였다. 가끔 내가 방황을 하거나 그릇된 생각을 할 때면 따끔히 충고해주고 걱정거리를 진지하게 함께 고민해주었다. 동갑내기인데도 어른스러운 생각과 말투로 나를 옳은 길로 이끌어주는 친구가 든든하기만 했다. 아쉽게도 각자 다른 지역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만나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지만 서로 생일을 챙기고 안부를 주고받으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연락이 점점 뜸해져 요즘에는 1년에 한두 차례 연락을 주고받을 뿐 전처럼 끈끈한 만남을 이어가진 못하고 있다. 산다는 게 다 그런 것인지 한때 팽팽했던 인연의 끈이 느슨해지는데도 내 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돌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먼저 만나자고 연락하지 않아도 이상할 것 없는 사이가 된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열여섯 소녀 시절로 돌아가 깔깔대며 웃을 날이 오리라 믿는다.


‘친구야, 너를 알게 된 건 내게 큰 행운이었어. 사는 게 바빠도 함께했던 추억 잊지 말자!’


김성은(배우)


1998년 SBS 드라마 〈순풍산부인과>에서 ‘박미달’ 역으로 데뷔해 그 해 연기대상 아역상을 받았던 연기자입니다. 대중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의 아픔을 극복하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의 진솔한 고백을 담아 최근 에세이 《한 뼘만 같이 걸을까요?》에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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