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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행복해 얼굴 빨개졌다네! 2020년 8월호
 
너무 행복해 얼굴 빨개졌다네!

어릴 적 즐겨보던 만화영화 속 악당들은 왜 하나 같이 얼굴이 빨갛게 그려졌던 걸까? 학창시절 내 별명은 ‘붉은 악마’였다. 피부과 의사의 말로는 ‘선천성 중증 안면홍조증’이라고 했다. 피부가 하얗거나 아예 까무잡잡한 친구들 사이에서 초등학생 때부터 나는 붉은 얼굴을 가진 아이로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사춘기 때도 내 고민에 비하면 친구들의 여드름은 장난이었다. 유난히 붉은 얼굴 때문에 점점 더 안으로 움츠러드는 나를 보고 선생님들이 “너 이 녀석, 혹시 부모님이 숨겨놓은 술을 몰래 훔쳐 마시는 건 아니지?” 하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같이 웃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를 졸라 피부과에도 다녀봤지만 우리 집 형편에 치료를 계속 이어가기가 버거웠다.


그러던 내가 친구들에게 “야, 너 완전 훈남이구나!”라는 칭찬을 들었던 날이 있다. 어머니가 화장할 때 쓰는 비비크림이 좋아 보여 얼굴에 바르고 학교에 간 날이었다. 얼굴빛이 달라지자 등굣길 친구들이 뒤를 돌아보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그 뒤로 나는 미백 화장품을 애지중지하게 되었다. 남자가 화장을 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이 없던 건 아니다. 부모님도 내가 화장을 하는 걸 탐탁지 않아 하셨지만 눈에 띄게 붉은 내 피부톤만 가릴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실,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장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헤어진 여자 친구 역시 남자가 화장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교제를 시작하면서 화장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는 금방 눈치를 챘다.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콤플렉스를 들킨 나는 자신감이 없어져 그녀를 피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연애는 아픈 상처만 남긴 채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럴수록 나는 더 화장에 집착하게 되었다. 화장이 내 콤플렉스를 극복하게 해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내 자신감은 더 작아지고 있다는 걸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새로운 사랑이 다가왔고 그녀와 나는 금방 가까워졌다. 이전의 연애에서 받은 상처를 회복하지 못한 나는 화장하는 일만은 절대 빼놓지 않았다. 한편으로 그녀도 남자인 내가 화장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거나 홍조를 보면 마음이 떠날까봐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함께 여행을 다녀와서 무인세차장에서 세차를 할 때였다. 고무호스를 정리하는데 음료수 두 잔을 들고 그녀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수고했어. 그런데 땀을 너무 흘렸네.”


음료수를 내려놓은 그녀는 비 오듯 땀을 흘린 나를 위해 가방에서 화장지를 꺼내 들었다. 화장지가 스치기만 해도 비비크림이 묻어날 판이라 나는 얼른 고개를 뒤로 젖혀 손을 피했다.


“아냐, 내가 닦아도 돼.”


“괜찮다니까. 내가 닦아주고 싶어.”


기어이 직접 땀을 닦아주겠다며 다가오는 그녀에게 엉겁결에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아, 됐다잖아!”


세차장 안의 모든 사람들을 돌아보게 할 만큼 느닷없는 고함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그녀의 얼굴을 본 나는 얼른 용서를 빌었다.


“소리 질러 미안해. 알았으니 자기가 닦아줘.”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다소곳이 얼굴을 들이밀자 그녀가 빤히 내 눈을 바라보았다.


“바보야, 그동안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내가 네 외모만 보고 사랑한 줄 알아?”


화장이 지워지지 않도록 얼굴 주변의 땀을 조심스레 닦아낸 그녀가 “다 됐다. 와, 내 남자친구 참 잘 생겼네” 하고 말하며 싱긋 웃었다. 그날 나는 비비크림이 모두 지워질 정도로 펑펑 울고 말았다. 내 안에 쌓여 있던 상처와 열등감까지 말끔히 씻어준 그녀의 따뜻했던 말 한 마디가 지금도 귀에 선하다.

백재열


중앙대 대학원 문학예술콘텐츠학과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서른 살의 대학원생입니다. 독서와 영화감상이 취미이며 ‘희망은 믿는 이의 편’이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네 살 터울의 남동생, 아홉 살 어린 여동생의 희망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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