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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을 자극하는 향기의 비밀 2020년 10월호
 
오감을 자극하는 향기의 비밀

 

 

조향사 김태형은 두 얼굴을 가진 ‘지킬앤하이드’ 같다.

영감을 떠올릴 때는 섬세한 감성을 지닌 예술가,

조향 작업에 착수할 때는 치밀한 과학자로 변한다.

글 한재원 기자 사진 이권호

 

 

마음만 먹으면 지금 있는 자리에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지난 시간을 ‘떠올린다’가 아니라 그때로 ‘돌아간다’고 표현해도 과하지 않을 만큼 어느 한 순간의 기억을 생생히 되살릴 수 있는 사람 말이다.

 

눈으로 보았던 풍경은 말할 것도 없고 피부에 닿은 감촉, 콧속으로 스며든 냄새, 마음으로 느꼈던 감정까지 여실히 불러일으키며 과거로 데려다주는 타임머신을 만든 남자가 여기 있다. 향수의 본산인 프랑스에서 6년여 간 조향 공부를 마치고 지난해 귀국해 자신만의 독특한 향을 개발 중인 조향사 김태형(26)이다. 그가 만든 타임머신 이름은 ‘10 Firmin-Gillot(피르망기오)’ ‘22 Richaud(히쇼)’ ‘43 Bellvue(벨뷰)’로 모두 직접 제조한 향수들이다.

 

해외 유명 브랜드들이 점령한 국내 향수시장에 혜성같이 등장한 그는 니치향수 브랜드 ‘에트르라’를 론칭해 많은 향수 애호가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니치향수는 소수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프리미엄 향수를 말한다. 대중성보다 개성이 강조되는 니치향수 분야에서도 그의 향수는 깊고 그윽한 잔향으로 호평을 받는다. 파리에서 보낸 시간의 향취가 담겨 있어서인지 타국의 향기 같은 몽환적이고 감미로운 향이 오래 지속된다. 그 향을 음미하며 그도 잠시 잊고 있던 옛 추억에 젖어드는 시간을 즐긴다.

 

“제가 영감을 얻었던 순간들이 그 길에 머물러 있어요. 그래서 제가 만든 향을 맡으면 거리의 풍경이 영화 속 장면처럼 피어오르죠. 제품 이름을 파리의 거리 이름으로 정한 것도 그 이유에요.”

 

먼저 다가와 위로하는 향

 

타임머신은 5년 전 어느 비오는 날, 파리의 피르망기오가 10번지의 한 낡은 건물로 그를 인도한다. 조향사의 꿈을 품고 홀로 유학길에 오른 스물 한 살의 그가 비에 쫄딱 젖은 채 집 앞 계단에 서있던 그날. 방학 첫날이란 걸 잊은 채 헐레벌떡 학교로 뛰어갔다가 소나기를 맞으며 되돌아온 참이었다.

 

향수대학교 루에스뻬에 다니던 시절, 상급 학년으로 올라가기 위해 기준점수를 통과해야 하는 시험을 일주일에 한 번씩 치르며 엄격한 교육과정에 지쳐 있던 시기였다. 그동안 그를 괴롭히던 압박감이 조금 전 바보 같은 행동을 했다는 자괴감과 뒤섞여 설움의 늪으로 몰아붙였다. 과연 낯선 타지에서 꿈을 향해 끝까지 달려갈 수 있을지 막막함에 몸서리치는 그를 달래주던 유일한 존재는 향기였다. 그 소중한 향기를 고스란히 재현한 ‘10 피르망기오’를 맡을 때마다 그는 외로운 이방인이 되어 어깨를 토닥여주는 향기의 손길을 다시금 느끼곤 한다.

 

“그때 살았던 건물에는 작은 중정이 있었어요. 집에 가려면 현관문을 열고 다시 중정으로 통하는 문으로 나가야 했는데 그 사이에 고목계단이 있었죠. 그런데 그날은 습기 머금은 나무 냄새가 너무 따뜻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 편안한 나무냄새에 기대 한참을 울었어요. 언제나 향기가 먼저 사람에게 다가와 위로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 향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무형의 향기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감지할 만큼 섬세한 감각을 지닌 그는 ‘22 히쇼’의 은은한 향내에서 보다 강렬한 기억을 끄집어낸다. 힘들었던 시간을 견디고 세계적인 향수 교육기관 이집카(Isipca)에 입학한 기쁨에 젖어있던 2018년 여름, 프랑스 중부의 깡드 생 마르땅 마을 에서 인턴생활을 할 때였다. 루아르 강변에서 저녁 산책을 하던 중 맞닥뜨린 일몰 풍경을 보고 넋을 잃고 말았다. 저물어가는 태양의 광채가 루아르 강의 살갗에 입맞춤하는 순간 발산하던 빛깔이 어찌나 경이롭던지 직접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아름다웠던 노을을 그는 베르사유로 돌아와 학기를 이어가던 무렵의 히쇼 가 22번지에서 다시 한번 보는 행운을 얻었다. 당연히 그는 그 찬연한 빛을 50ml 작은 병에 박제해 놓았다.

 

 

소중한 기억을 담는 향

 

조향(調香)에서는 본래 한 번 맡은 향료를 잊지 않는 ‘후각기억력’이 중요하다. 그래야 수천 가지 향료 중에서 적절한 것을 조합해 원하는 향을 구현할 수 있다. 그는 향을 창조하기에 참으로 적합한 사람이다. 향료 뿐 아니라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생기면 오감을 총동원해 각인하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루아르 강의 태양빛을 손끝으로도 느끼려고 하늘로 팔을 뻗어보았듯이 그는 눈이 내리면 입을 벌려 맛을 보거나 자연 풍광에 반하면 그곳 고유의 냄새가 몸 속 깊이 들어올 때까지 한참 눈에 담는다. 일상의 찰나를 성실히 기억에 남겨둔 덕분에 그는 지난 감정이라 해도 보다 명료하게 향으로 재현해낸다. 이는 시간 여행이 가능한 향수 제조의 비법이기도 하다.

 

“후각은 기억을 가장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감각이에요. 조향을 공부하면서 이것을 알게 되자 아버지(소설가 故김소진) 생각이 나더라고요. 생전에 후각상실증을 앓으셨거든요. 제가 네 살 때 돌아가셔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그 어떤 추억도 쉽게 떠올리시지 못했을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어쩌면 저는 아버지의 안타까웠던 삶을 달랠 운명이지 않나 싶어요.”

 

누구든지 자신이 만든 향을 맡고 따뜻했던 과거든, 기대하는 미래든 지금과 다른 시공간에 놓이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는 향기로 감동을 주는 예술가가 되길 꿈꾼다. 고1 때 처음 조향사의 꿈을 품었던 계기도 ‘조향은 과학적 지식과 예술적 감각이 겸비돼야 하는 분야’라는 점에 매료됐기 때문이었다. 예술의 첫째 조건은 창작자의 메시지가 담긴 고유한 작품일 터. 그는 ‘가급적 트렌드한 향료는 쓰지 않기’ ‘하나의 향수에 20개 이상의 향료를 사용하지 말 것’ ‘내가 전하고 싶은 순간만 표현할 것’ 등 자신만의 작업 규칙을 정해놓고 늘 상기하며 시류에 편승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다.

 

흘러가는 시공간의 감정을 무형의 향으로 표현하는 일은 고난이도의 작업이다. 어떤 향료를 어떤 비율과 얼마큼의 농도로 조합할 것인지 포뮬라(조향 레시피)를 만드는 과정은 0.01g만 차이가 나도 결과물이 전혀 달라지기에 세심한 판단이 필요하다. 게다가 향은 개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평가되므로 목표점을 정하기도 쉽지 않아 하나의 향을 탄생시키기까지 그는 짧게는 6개월, 길게는 3년 을 소요하면서 정답 없는 문제를 푸느라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힘들지만 자신이 경험한 감각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 노력하는 것 말 고는 뾰족한 수가 없다.

 

“향에 제 감정을 담고, 다른 사람도 그 향에 감정을 담아주었으면 좋 겠어요. 그래서 각자 느낀 감정에 대해 누군가와 서로 얘기 나누는 순간을 상상하면 전율이 이는 것 같아요. 그날을 위해 제가 사랑하는 일상의 장면들을 최선을 다해 향으로 구현해낼 계획이에요.”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많은 사람은 분명 축복받은 사람이다. 그가 꿈꾸는 예술가가 되어 있을 때쯤엔 그의 아름다운 시간이 담긴 50ml 병이 얼마나 늘어나 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장소협찬 스튜디오펠트(02-2236-6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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