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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라떼는 말이야!
반전있는 선배의 잔소리 2020년 10월호
 
반전있는 선배의 잔소리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에 인턴으로 일했던 SBS의 한 다큐멘터리 제작팀은 내게 처음으로 사회생활의 쓴맛을 맛보게 해준 곳이다. 범죄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잠복취재까지 서슴지 않느라 항상 예민하고 피곤한 상태였던 제작진은 다가서기 어렵기만 한 존재들이었다.

나를 가장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던 상사는 나보다 열다섯 살 많은 선배 작가였다. 똑 부러지는 말투와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인 선배가 멋있어 보이기도 했지만 “내가 해봐서 아는데…”로 시작하는 그녀 특유의 레퍼토리는 늘 나를 주눅 들게 했다. PD의 지시로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어린이 안면기형 환자를 찾아야 했을 때만 해도 그렇다. 국내 병원이란 병원에 40통의 전화를 돌려봐도 PD가 원하는 케이스를 한 건도 찾지 못해 시무룩해 있는 내게 선배가 해준 말은 이랬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별로 어렵지 않았어. 희주 씨는 왜 그렇게 헤매?”

선배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업무 때문에 힘들어할 때마다 ‘내가 그 일을 맡았을 때는 쉽게 해결했다’는 식으로 나를 위축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웬일인지 매번 냉정한 말만 던지던 선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티타임을 제안했다. 또 무슨 자기자랑을 하려고 그러나 싶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마주앉은 선배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희주 씨가 일에 겁을 내지 않았으면 싶었어. 내가 인턴일 때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난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막상 해보면 별 것 아닐 때가 많더라고.”

선배의 조언은 케이블채널에서 방송작가로 일한 지 6년 차가 된 지금도 큰 힘이 되고 있다. 개편 아이디어를 짜느라 지칠 때면 난 선배의 조언을 상기하며 ‘별 것 아니야’란 생각으로 허리를 곧추세운다.

 

이희주

 기대만큼 오르지 않는 시청률도, 기획안을 채운 식상한 아이디어도 반갑지 않은 방송작가입니다. 원치 않는 상황이 닥칠 때마다 지금은 친한 언니, 동생으로 지내고 있는 선배의 조언을 상기합니다. 같은 길을 걷는 동지가 있다는 건 큰 축복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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