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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감아도 보이는 희망
나에게서 나를 보호하는 일 2020년 10월호
 
나에게서 나를 보호하는 일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던 사람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는데, 경찰이 최류탄과 고무탄을 썼대요.”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비무장 상태의 한 흑인남성이 사망한 사건 때문에 미국 전역이 시끄럽던 때, 잘 준비를 마친 내게 아내가 뉴스 속보를 전해주었다. 아내는 경찰의 과잉 진압 이유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사진촬영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며 시위대 해산 후 대통령이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던 세인트존스 교회 앞까지 걸어가 성경을 들고 사진을 찍은 일에 대해 여론이 좋지 않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예상했던 것처럼 다음날부터 대통령이 성경을 이용해 연출된 사진을 찍었으며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평화롭게 시위하는 사람들을 과격한 방법으로 해산시켰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무엇 보다 트럼프를 곤혹스럽게 한 건 이 사건 이후 변함없이 그를 지지해주 던 크리스천 지도자들이 공개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부터 대통령 지지율이 눈에 띄게 떨어지기 시작했고 11월 대선가도에 빨간불이 들어왔다는 보도가 계속되었다. 그 날, 대통령이 성경책을 들고 사진을 찍게 놔둔 것이 큰 실수였다고 때 늦은 후회를 내비치는 백악관 보좌관들의 인터뷰를 보며 나는 항상 일상을 함께하던 안내견 ‘지기(Ziggy)’와 ‘빅(Vic)’을 떠올렸다.

 

시각장애를 가진 나는 대학 때부터 결혼 초기까 지지기, 빅과 같이 다녔다. 둘 다 래브라도 레트리 버였고 잘생긴 금발의 반려견들이었다. 하루 24시간을 같이 하다 보니 때때로 녀석들이 내 몸의 일부분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안내견들은 시각장애인 마스터(master) 인 내가 장애물을 비켜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인도와 차도 사이의 커브, 혹은 계단 앞에서 일단 정지함으로써 안전을 지켜주었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길의 방향을 잡는 일은 안내견이 아니라 시각장애인 마스터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마스터의 지시에 따라 안내견은 계속 앞으로 가거나 왼쪽, 오른쪽으로 돌라는 명령에 따를 뿐이다. 그런데 안내견들도 경우에 따라서 마스터의 명령에 불복종하도록 특별 훈련을 받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안내견을 입양하기 위해 적응 훈련을 받았던 학교(The Seeing Eye)는 뉴저지주 모리스타운이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훈련장으로 쓰이는 그곳 거리에서는 안내견과 마스터들, 그리고 이들을 훈련시키는 트레이너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훈련 스태프 중 한 명이 하는 일이 무척 흥미로웠다. 그 트레이너는 개나 사람을 훈련시키는 일을 하지 않고, 차를 운전하면서 일부러 위험한 상황을 만드는 일을 담당했다. 개들에게 지적 불순종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안내견들은 마스터의 명령에 따라 길을 안내하도록 훈련받는다. 걷는 방향이나 차도를 건너는 결정은 전적으로 마스터의 몫이다. 그런데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교통 흐름을 읽고 차도 횡단 여부를 결정할 수 있을까? 한국처럼 ‘소리 나는 신호등’이 있는 나라도 있지만 이런 장치가 있는 거리는 미국에도 매우 드물기 때문에 미국에 서는 시각장애인들이 평행 거리의 차들이 움직일 때 수직 거리, 즉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길을 건너도록 훈련받는다. 평행 거리의 차량 신호등이 초록색일 때 앞거리의 신호등은 대개 붉은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스터가 판단을 잘못할 때도 있고, 신호를 무시한 차가 갑자기 달려오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안내견은 “앞으로 가(forward)!”라는 마스터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반대로 마스터를 뒤로 세게 끌어당기도록 훈련을 받는다. 시각장애인의 위험한 결정에 복종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문득 두 마리 안내견들을 떠올린 건 트럼프 대통령의 보좌관 중에도 다가올 정치적 위기를 예측하고, 잘못된 결정에 반대하는 이가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살다 보면, 우리는 모두 비슷한 경우를 겪으며 나 또한 예외는 아니 었다. 어떤 친구에 대해 심한 말을 적은 편지를 찢어버리라고 조언하던 친한 친구, 희망 없는 짝사랑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순규, 정신 차려! 너와는 너무 맞지 않는 사람이야”라고 충고해줬던 동창이 있었다. 위험요소가 많은 직장이니 야망을 줄이고 안정을 먼저 생각 하라고 호소하던 아내도 옆에 있었다.

 

물론 그때 나는 그들의 충고를 다 듣지 않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해 결과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충고를 무시하고 보낸 편지로 친구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 때문에 오랫동안 속앓이를 했다. 다행히 위험한 직장 선택은 타의에 의해 좌절되었지만 만일 그 길로 들어섰다면 나와 가족들은 심한 불운에 빠졌을 것이라는 걸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그 뒤 나는 내게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친구나 선생님, 부모나 배우자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내 충동적인 행동에 대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지혜로운 조언을 한다 해도 당사자인 내가 듣지 않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안내견의 지적 불순종을 무시하고 마스터가 직진만 고집할 수 있듯, 냉정하고 객관적인 주위 사람들의 충고와 권고, 조언과 경고를 무시할 수 있는 위험성은 내게도 늘 존재한다.

 

올 3월부터 재택근무를 하며 집에만 있어서인지 요즘 건강이 나빠지고 있는 걸 느낀다. 몸무게가 늘어나면서 평생 없었던 당뇨 진단을 받고 보니 속이 뜨끔했다. “그러니 주는 것만 먹으면 확실히 살도 빠지고 건강해질 텐데…” 라며 걱정하는 아내의 잔소리, 아니 충고를 들으며 나는 요즘 다이어트를 실천하는 중이다. 피자를 즐겨 먹거나, 아이스크림을 찾아 냉동고를 뒤지고 쿠키를 찾아 주방 캐비닛 앞을 배회하는 일부터 그만두기로 했다. 남편의 건강을 생각해서 식단을 결정하는 아내의 조언을 따르는 것도 어쩌면 ‘나에게서 나를 보호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신순규 (재미 애널리스트)


아홉 살 때 시력을 잃었지만 학업에 매진해 25년 넘게 미국 월가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각장애인 증권 애널리스트입니다. 시각장애인 최초로 ‘금융 분야의 최종 자격증’이라 불리는 CFA를 취득했고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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