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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폴란드의 만성절 2020년 10월호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폴란드의 만성절

 


내가 사는 곳은 폴란드 바르샤바 남동 쪽에 위치한 빌라누프(Wilanow) 궁전 옆 주택가이다. 빌라누프 궁전은 전쟁의 상흔으로 많은 것이 유실된 바르샤바에서 거의 유일하게 수백년간 남아있는 왕실 궁전으로, 날씨가 좋은 가을이면 소풍삼아 오는 학생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고궁이 있어 관광지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식당과 작은 상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중심부에는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공동묘지가 있다.

 

처음에는 집에서 걸어서 5분도 채 안 되는 거리에 공동묘지가 있다는 사실이 살짝 무섭기도 하고 꺼림칙하기도 했다. 그러나 폴란드에서 살다 보니 이곳에선 묘지가 공원이나 학교처럼 많은 사람들 이 모여 사는 마을 한복판에 자리 잡고 언제든 먼저 떠난 가족들이 그리울 때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 다. 주말이면 예쁜 꽃과 초를 들고 그리운 가족들을 찾아 삼삼오오 공동묘지를 찾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폴란드의 가장 큰 명절 중 하나인 만성절(Wszystkich Swietych, 11월 1일)은 하늘로 떠난 가족과 친지들 혹은 위인들을 방문하는 날이다. 인구의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폴란드는 국민 대다수가 사후세계를 믿기 때문에 이 날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폴란드 사람들은 만성절에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과 친구들을 찾아 묘지에 촛불을 밝히고, 고인을 위한 기도를 바친다.

 

대부분의 묘지에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혹은 형제들이 함께 모여 잠들어 있다. 그러나 아무도 없이 혼자서 외롭게 잠들어있는 묘비도 찾아볼 수 있 다. 젊은 나이에 전쟁에 참여해서 가족과 후손을 남기지 못한 전사자들, 공산화에 반대하는 시위에서 희생된 국민들의 묘석이 그러하다.

 

폴란드는 1, 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나라 중 하나이며, 제 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대규모의 군사 저항으로 알려진 바르샤바 봉기가 있었던 나라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수도 바르샤바의 영문이름인 와르소(Warsaw)를 ‘전쟁을 보았던 도시’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하여 폴란드의 만성절은 수십만 명의 이름 없는 희생자들을 만들어낸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날이기도 하다. 폴란드 국민들은 희생자들을 잊지 않고 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보듬기 위해 연고자가 없는 외로운 묘비에도 촛불을 밝힌다.

 

바르샤바에서 300여 km 떨어진 브로츠와프에는 이 나라에 아무 연고가 없는 한 북한 소녀가 잠들어있다. 소녀의 이름은 김귀덕. 1950년 폴란드 사회주의 정부는 북한과 같은 정치적 이념을 공유 한 국가로서 한국전쟁으로 고아가 된 북한 어린이 1270명을 데려와 이 나라에서 키우는 것으로 전쟁 원조를 했다. 아 이들은 6년 동안 폴란드에서 지내다가 어느 날 북한의 송환 명령에 의해 갑자기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많은 아이들 중 ‘김귀덕’이라는 여자아이는 백혈병에 걸려 1955년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소녀는 치료받던 병원이 있던 브로츠와프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런데 홀로 외롭게 잠들어있을 것 같은 이 무덤에도 작년 만성절에 여러 개 의 촛불이 켜졌다. 소녀의 사연을 알고 있는 폴란드 사람들의 손길이었을까, 아니면 브로츠와프에 살고 있는 한국 교민 들의 발걸음이었을까. 그 모두의 마음이 모여 소녀의 무덤은 수십 개의 촛불이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올해 만성절에는 나도 꽃과 초를 챙겨서 아무도 찾지 않는 쓸쓸한 묘를 찾아가 봐야겠다. 많은 사람들이 밝혀놓은 경건하고 아름다운 촛불 속에서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폴란드의 마음을 본다.

 

주정현(브런치 작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주재원으로 일하는 남편과 함께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세 아이들을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 폴란드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블로그 ‘폴란드에서 육아하기’와 브런치 ‘바르샤바에서 쓰는 일기’에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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