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궁리
행복일기
샘터시조
 

 

Home > 월간샘터 > 이달의샘터
내일을 여는 사람
어느 평범한 성우의 특별한 목소리 2020년 11월호
 
어느 평범한 성우의 특별한 목소리

 

한때는 너무 평범하다는 생각이 들어 애정을 주지 못했던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만인에게 웃음을 주는 목소리가

그녀 자신에게 가장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한재원 기자 사진 이권호

 

 

양파 같은 사람이라는 말은 숨은 매력이 계속해서 발견되는 사람을 의미한다. 가수 양파의 예명은 음악으로 매번 새로운 감동을 전하겠단 의지의 표현이고, 백종원은 무궁무진한 요리 아이디어가 돋보여 ‘양파 같은 요리연구가’라 불린다. 그리고 여기 또 한 사람, 프리랜서 성우 김보민(31)은 재치 넘치는 성대모사를 끊임없이 선보이는 ‘양파 같은’ 셀럽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겉모습만 봐서는 외모도, 말투도 지극히 평범한 그녀의 반전매력은 16만여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채널 ‘쓰복만’의 영상들에서 더욱 배가된다. 목소리 연기로 1인 10역을 완벽히 소화해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던 <스카이캐슬>부터 <싸이코지만 괜찮아><부부의 세계><이태원클라쓰> 등까지 드라마 성대모사마다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극중 인물들과 100% 싱크로율을 자랑하는 그녀. ‘인간 복사기’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탁월한 묘사력이 강점이지만 그녀의 성대모사는 뭐니 뭐니 해도 익살스러움이 가장 큰 특징이다. <부부의 세계> 주인공 지선우를 능청스런 표정연기로 흉내 내거나 배우 이정재의 영화 <관상> 속 명대사를 사극 분장까지 하고 실감나게 따라하는 등 그녀의 명불허전 패러디들은 감탄과 웃음을 자아낸다.

 

“원래 캐릭터와 얼마나 비슷한지도 중요하지만 저는 재미에 더 초점을 맞춰요. 배우랑 똑같다는 말보다 웃긴다는 반응을 얻을 때가 제일 좋아요. 사람들이 제 성대모사를 보면서 잠시라도 걱정거리를 잊었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그래서 조금 망가지더라도 배우의 특징을 약간 과장하거나 우스꽝스럽게 표현하죠.”

 

개그우먼 못지않은 끼로 봐선 범상치 않은 이력의 소유자일 것 같지만 그녀의 활동분야는 의외로 단순하다. EBS 성우극회에서 2년간 전속 성우로 일하다가 2019년부터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오디오북 낭독 등 성우로서 으레 해야 하는 일들만 해오던 와중에 유튜브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며 조금 다른 행보를 걷게 된 것이 인기의 시작이었다.

 

“유튜버가 돼야겠다 결심하고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스카이캐슬>을 보다가 재미 삼아 목소리 연기를 해보고 기록용으로 올렸는데 그게 그렇게 화제가 될 줄 몰랐죠. 그때 사람들이 ‘너무 재밌다, 많이 웃었다’라고 말해주는데 참 기쁘더라고요. 특출난 재능을 가진 것도 아닌데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구나 싶어서 너무너무 신기했어요.”

 

 

 

 

 

다른 사람에게 성대모사로 웃음을 주는 일은 사실 그녀가 유튜버로 유명해지기 전부터 삶을 유쾌하게 사는 비결 중 하나였다. 평소에 가족이나 친구들 사이에서 분위기메이커를 자처하는 그녀는 지금도 집에 귀가할 때 종종 아버지 흉내를 내곤 한다. 현관문을 열면서 중후한 목소리로 “김 여사” 하고 부르면 진짜 아버지가 오신 줄 알고 “왔어요?” 하며 방에서 나오는 어머니 모습에 모녀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다. 고등학교에 입학해 반 친구들 앞에서 처음 자기소개하는 시간에도 교실을 웃음바다로 만든 적이 있다. 얌전한 인사 대신 당시 <개그콘서트>의 인기 유행어였던 “똥칼라파워!”를 외치며 ‘복학생’ 캐릭터를 흉내 내어 서먹한 분위기를 일시에 누그러뜨리며 친구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녀의 이런 재기 발랄함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저라고 왜 고민이 없고, 낯설지 않겠어요. 하지만 제가 긴장한 모습을 보이면 상대방도 불안해지잖아요. 사람은 서로에게 거울 같은 역할을 해서 상대가 웃으면 기쁘고, 울면 슬퍼지죠. 이왕이면 저로 인해 다른 사람이 웃었으면 좋겠어요. 웃는 얼굴을 보며 즐거워지는 건 결국 제 자신이거든요.”

 

마치 지문과 같아서 사람마다 고유의 형상이 있다는 성문(聲紋). 음성에도 무늬가 있다면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성우 김보민의 음성은 스마일 모양이 아닐까? 특유의 밝은 에너지가 묻어나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그녀의 목소리지만 그녀가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했다면 지금처럼 많은 이들에게 기쁨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성우아카데미를 다니며 성우 준비를 했던 시절, 본인 스스로 재능에 대한 의심을 쉽사리 거두지 못했던 시기가 있었다. 열 번 넘게 방송사 시험에 낙방하면서 ‘내 음색이 너무 평범한 것 아닐까?’ 하는 우려가 스스로를 위축시켰다.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 낭랑하거나 색깔이 뚜렷한 목소리를 지닌 다른 성우지망생들에 비해 자신의 목소리는 너무 단조롭게 들렸던 것이다.

 

음악보다 부드러운 음성

 

전화상담 안내원, 행사 MC 등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해결하며 성우 공부를 병행했던 6년이란 시간 속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이제 그만 현실을 즉시하고 다른 길을 택해’라는 마음의 소리와 싸우는 일이었다. 끊임없이 들려오던 유혹의 말을 물리쳐준 건 당시 그녀를 지도해준 선생님의 격려였다. “네 한계를 한 단계 뛰어넘느냐에 따라 본래 목소리가 더 빛을 발할 수도, 아닐 수도 있어”라는 가르침에 유심히 귀를 기울이던 그녀는 비로소 그 한 단계를 뛰어넘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목소리는 절대 바꿀 수 없잖아요. 그걸 인정하고 나니까 제 목소리를 보는 시각이 달라지더라고요. 오히려 어떤 색깔로든 쉽게 칠할 수 있는 백지 같은 목소리란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 최대한 다채로운 소리를 내려고 노력했어요. 길을 가다가도 할아버지, 할머니나 아이들의대화에 귀 기울이면서 그들의 감정을 제 목소리에 담아보려고 애썼죠.”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마침내 500대 1의 EBS 공채 경쟁률을 뚫고 꿈을 이룬 그녀는 지금도 특색 있고 아름다운 목소리 톤을 들으면 존경심부터 생긴다. 인사 한마디에서부터 깊은 울림이 느껴지는 베테랑 성우들에 비해 자신의 목소리는 여전히 밋밋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는 예전처럼 목소리에 불만을 갖거나 위축되지 않는다. 누구의 곁에나 있을 법한 친근한 음색을 자신의 장점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의 유튜브 채널에서는 성대모사뿐 아니라 본래 음색이 확연히 드러나는 내레이션도 구독자들의 귀를 즐겁게 한다. 스트레칭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이나 카레 만들기 같은 일상적인 풍경 위로 흐르는 그녀의 음성은 평화롭고 잔잔해 귀에 쏙쏙 들어온다. EBS 전속 성우였을 때 녹음했던 휴먼다큐멘터리 해설들도 감동과 웃음이 있는 이야기에 딱 어울리는 파스텔 톤의 음색으로 호평을 받았다.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오래 전에 그녀 자신이 위안을 느꼈던 추억 속 목소리와 조금씩 닮아 간다.

 

“중학생 때 즐겨 들었던 <정지영의 스윗 뮤직박스>라는 라디오프로가 있었어요. DJ의 음색이 주는 편안함이 어느 음악보다 듣기가 좋았죠. 제 목소리도 누가 들어도 부담 없이 정겨웠으면 해요. 성대모사도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서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죠. 즐거움뿐만 아니라 여러 감정이 녹아든 인간미 넘치는 목소리로 따뜻한 기운을 전파하고 싶어요.”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인정한 후부터 그녀는 삶에 대한 감사함이 더 커졌다. 여러 색으로 물들 수 있는 무채색의 목소리를 갖고 있는 것도, 자신 같은 평범한 사람이 많은 이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다는 사실도 그저 행복으로 받아들인다. 어쩌면 그녀의 목소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음글] 걸크러시 래퍼가 삶의 장애에 대처하는 자세
[이전글] 오감을 자극하는 향기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