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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건네던 인사 '오늘도 무사히' 2020년 11월호
 
버스가 건네던 인사 '오늘도 무사히'

지난봄부터 새롭게 생긴 습관 하나가 있다. 기다리던 버스가 오면 곧바로 타지 않고 차창 너머로 안을 살피는 습관이다. 버스 내부가 한산해 보이면 그때 올라탄다.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많이 기다리지 않아도 될 만큼 교통편이 발달한 요즘 시대에 불현듯 오래된 기억 하나를 들추며 격세지감을 느끼곤 한다.

 

‘오늘도 무사히.’ 그 짧은 문구는 항상 운전석 위에 걸려 있었다. 상경하여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버스로 장거리 통학을 경험했던 1975년부터 그 문구는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때의 버스는 가운데에 있는 출입문 하나로 승하차가 모두 이뤄지는 구조였다. 아침 만원 버스에 겨우 몸을 구겨 넣고 보면 앉을 자리는커녕 서있을 공간조차 찾기 힘들 때가 많았다. 그 상황에서 발견한 상석이 보닛처럼 널찍한 철제 구조물이 있는 운전석 옆 중앙부였다. 요즘에는 볼 수 없는 ‘전면 엔진룸’이었다.

 

엔진룸은 단골 승객들의 안락한 피난처였다. 운 좋으면 비집고 앉을 수도 있고, 아니어도 무거운 가방 하나쯤 올려둘 수 있어서 편했다. 엔진룸 위에 걸터앉아 따끈하게 하반신을 데우며 등교하면 겨울의 냉기도 잠시 잊히는 기분이었다. 여름이어도 엔진룸이어서 유난히 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후끈 땀에 절기는 버스 안 어디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스멀스멀 올라오는 엔진룸의 기름 냄새를 맡으며 늘 고개 들어 마주한 것이 ‘오늘도 무사히’라고 적힌 계몽 포스터였다.

 

돌이켜보니 벌써 45년이 지난 케케묵은 추억이다. 그로부터 45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 서울역을 기점으로 하는 3개 단거리 노선을 공영 버스 7대가 달리기 시작한 1928년 4월 22일. 버스를 타보려고, 혹은 구경이라도 해보고자 군중이 쇄도했다. 오전 9시부터 운행을 실시했던 행정 당국은 깜짝 놀라 오후에 한대를 더 긴급 편성했다. 저녁 7시에 운행을 종료하고 회수된 버스표는 6,000장이 넘었다. 1매 요금이 7전이었으므로 하루 동안 총 420원이 수금되었다는 계산이 나왔다. 일본에서 수입한 52원의 버스 8대 값에 버금가는 거액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간의 운행 실적은 총수입이 5,000원을 상회하여 순이익이 1,600원을 넘었다. 당국이 예상했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흑자운행 덕분에 운행 노선과 대수가 점점 늘어나고, 요금은 차츰 인하되었다. 당시 버스 못지않게 사람들의 호기심을 끈 것은 버스에 동승하는 ‘차장’의 존재였다. ‘코발트 빛 정복, 커다란 혁대로 우악스레 허리를 잡아매고, 가죽가방을 시골농사꾼 담배쌈지처럼 앞으로 내려뜨리고 정차할 때마다 정거장 이름을 외치는 근대도시의 새 풍물. 버스 승무원, 뻐스 걸.’ 당시 신문에 묘사된 차장의 모습이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취업한 그들의 일과는 격무의 연속이었다. ‘뻐스의 흔들림을 온몸으로 지탱하며 승객들과 부대끼며 일본말과 한국말로 목이 쉬어라 외쳐대는 7시간의 연속노동’이었다. 고생에 비해 받는 임금은 후하지 않았다. 버스 열 번 탈 수 있는 금액 정도가 초창기 일당이었다. 운행종료 후에도 예상치 못한 곤욕을 치르기도 했는데 수금액 정산에서 오차가 나는 경우였다. 액수가 모자라면 자비로 물어내야 했다. 버스 차장의 애환은 버스 혼잡도가 극에 달했던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20여 년 간 정점을 찍고 사라졌다.

 

이제 버스는 차장의 애환보다는 승객들의 애환을 싣고 달린다. 2020년의 승객들은 한겨울에도 더울 정도로 난방이 가동되는 쾌적한 버스에 몸을 싣지만 저마다 삶의 고난을 헤쳐가야 하는 운명만큼은 변함이 없다. 엔진룸, 차장, 버스표 등 사라진 많은 것들 중에서 ‘오늘도 무사히’란 기원의 인사가 가장 그립다.

 

박윤석(역사저술가)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사에서 20여 년간 기자로 일했습니다. 《경성 모던타임스》를 통해 한국의 근대사를 조망한 이래 역사강의를 하며 한국 근현대사에 새로운 시각을 부여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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