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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섭섭 군대 이야기
온수 샤워가 일깨우는 작은 행복 2020년 11월호
 
온수 샤워가 일깨우는 작은 행복

가을이 깊어간다. 서늘한 날씨에 거리를 헤매다 귀가하면 샤워기 꼭지에서 떨어지는 따뜻한 물줄기가 그리워진다. 물줄기가 몸에 닿자마자 생각할 틈도 없이 ‘아, 좋다!’라는 감탄사가 새어 나오는 그 포근함. 지금은 언제든 수도꼭지만 돌리면 누릴 수 있는 행복이지만 군대에서는 결코 당연하지 않은 호사였다.

 

내가 근무하던 부대는 전방이었기 때문에 10월만 돼도 아침저녁으로 코가 빨개질 만큼 칼바람이 불었다. 그런 날씨에 하루 종일 훈련을 하다 보면 밥보다도 간절해지는 것이 바로 온수 샤워였다. 동절기엔 온수가 나오지만, 매일 소비할 수 있는 기름 양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조금만 늦어도 비명이 터지는 찬물 샤워를 감수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샤워장 풍경은 늘 ‘빨리감기 버튼’을 눌러 놓은 듯 급하게 흘러갔고, 그 모습은 훈련을 받을 때보다 더 분주해 보였다.

 

겨울 샤워장의 추억을 더듬어 보면 대략 이러했다. 저녁식사를 마친 각 소대 고참병들은 몸을 씻기 전에 우선 막내를 불러 물 온도를 체크하고 오라는 특명을 내린다. 보일러병이 보일러 전원을 켠 후 일정 시간이 지나야 온수가 나오기 시작하기 때문에 적절한 타이밍을 파악하는 것이 ‘온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군인의 자세였다. 군인에게는 샤워도 정보력 싸움이다.

 

정찰대로부터 내무반에 온수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달되면 고참병부터 부리나케 샤워장으로 달려간다. 세면도구와 수건을 집어 들고 샤워장에 들어섰을 때 실내가 텅 비어 있다면 그날은 말 그대로 ‘계탄 날’이나 다름없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수도꼭지를 틀고 마침내 따뜻한 물줄기가 쏟아져 피부에 닿으면 하루 종일 고된 훈련으로 쌓인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물론 집에서처럼 오랫동안 뜨끈한 물줄기를 맞으며 멍하니 서 있을 순 없었지만 그 짧은 행복만으로도 충분했다.

 

사람의 감정은 참으로 신기하다. 좋은 것을 누릴 때는 더 좋은 것을 갖지 못해 아쉬워하지만, 무언가 부족한 환경에서는 작은 것만으로도 쉽게 행복을 허락하게 되니 말이다.

 

찬바람이 불어오니 문득 그때가 그리워진다. 군 생활이 아니라 그처럼 사소한 일에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었던 순수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오늘 저녁엔 따스한 물줄기가 살갗에 스미는 느낌을 좀 더 깊이 느껴봐야겠다. 잠시 잊고 있었던 일상에 대한 감사가 수증기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를 수 있도록!

 

권혁일

파릇파릇하던 까까머리 군 시절을 보내고 어느덧 예비군 8년차이자 올해로 서른 살에 접어든 웹툰 작가입니다. ‘허길슨’이란 필명으로 네이버포스트에 <어차피 군대 이야기> 시리즈를 연재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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