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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의 메신저'가 되어준 필통 2020년 12월호
 
'우정의 메신저'가 되어준 필통

얼마 전에 초록색 지퍼가 달린 귀여운 보라색 필통을 구입했다. 직장인 시절에는 그날 들고 나갈 가방이 작으면 가장 먼저 빼는 물건이 필통이었다. 볼펜은 가방 속 책장 사이에 껴두어도 문제없던 물건이었다. 책방을 열고 자전거가 이동수단이 된 다음부터는 늘 필통을 소지한다. 노트북을 넣을 수 있으면서 두 손이 자유로워야 해서 주로 공간이 넉넉한 백팩을 메기 때문에 이제 필통을 빼놓을 필요가 없어졌다.

 

중고등학생 때 나는 요즘 말로 ‘필통 성애자’였다. 책상 서랍 하나를 통째로 필통 보관하는 용도로만 쓸 정도였다. 그때는 돈이 생기거나 엄마가 준 용돈에서 준비물이나 참고서를 사고 잔돈이 남으면 필통을 샀다. 좋아하는 캐릭터가 그려진 철제필통부터 속이 훤히 보이는 비닐 재질의 투명필통까지 다양한 제품을 사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렇게 사들인 필통을 나는 매일 바꿔 학교에 가지고 갔는데 별 것 아닌 일 같아도 많은 볼펜을 날마다 새집으로 이사시키는 것은 부지런함을 필요로 했다. 그럼에도 난 새로운 필통을 들고 학교에 가는 일이 즐거웠다. 필통은 학생 신분으로서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아이템이어서 수집하기 시작했지만 친구들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필통에 대한 애정은 더욱 커졌다.

 

그날은 준비물을 사러 들른 문구점에서 독특한 디자인의 필통을 구매한 날이었다. 교실 책상 위에 별 생각 없이 새로 산 필통을 툭하고 꺼내놨는데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이런 필통은 처음 봐. 어디서 샀어?” “혹시 필통 모으는 게 취미니?”

 

친구들은 내 필통을 시작으로 나에 대해서도 점점 궁금해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걸어왔다. 평소 내성적인 성격 탓에 친구들과 대화 나눌 기회가 많이 없었는데 필통 덕분에 받게 된 관심이 싫지 않았다. 비록 필통이란 매개체 덕분이긴 했지만 그로 인해 내 인간관계가 넓어진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내 취향이 다른 누군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현상도 흥미로웠다. 나와 똑같은 필통을 사고 싶어 하는 친구도 생기고, 같이 볼펜을 사러 가자고 하는 친구들도 늘어났다. 그렇게 필통은 학창시절, 내 우정의 메신저가 되어주었다.

 

돈을 벌기 시작한 후로는 가방, 신발 같은 패션잡화가 필통을 대신했다. 새 물건을 구입하는 건 자기 만족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이유도 있지 않을까? 평소에 적지 않은 돈을 쇼핑에 투자하는 직장 동료가 있었다. 그녀는 감각적인 아이템을 주로 사 모았고 동료들은 그녀의 물건을 좋아했다. 단순히 패션용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지내던 어느 날, 그녀와 산책을 하다가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제가 쇼핑을 끊지 못하는 이유가 사람들의 시선 때문인 걸 알았어요. 사람들이 제 물건에 관심 갖는 걸 마치 내 자신이 그들에게 인정받는 걸로 착각하고 있었더라고요. 지나고 보니 좀 씁쓸하고 후회스러워요.”

 

요즘 사람들은 SNS에서 자신이 소유한 물건을 열심히 사진 찍어 보여준다. 그 행동의 이면에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안정감을 확인하고 싶은 바람이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타인이 새로 산 물건을 올리면 왠지 모를 질투심이 생겨 ‘좋아요’도 누르지 않고 그냥 넘겼다. 하지만 요즘은 ‘잘 샀다’ ‘예쁘다’ 같은 댓글까지 남기며 누군가의 쇼핑 이력에 반응을 보인다.

 

겪어보니 내가 갖지 못한 걸 가졌다고 질투할 게 아니라 호기심과 관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 그게 내 일상을 재밌는 시간으로 채우는 것 같다. 새 필통을 샀다고 시샘하는 게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관심 가져주던 그 옛날 친구들처럼 말이다. 그나저나 서랍 가득했던 그 많은 필통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문득 그 시절 나와 친구들을 연결해주던 필통들이 보고 싶어진다.

 

이유미(에세이스트)

8년 넘게 총괄카피라이터로 일했던 '29CM'를 퇴사한 후 안양에 책방 '밑줄서점'을 열였습니다. <자기만의 (책)방>, <일기를 에세이로 바꾸는 법>등을 펴냈으며 브런치에 '소설로 카피 쓰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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