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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 시대의 커피 한 잔 2020년 12월호
 
전염병 시대의 커피 한 잔

지난 5월 18일, 모처럼 가족이 함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와 사망자 수치가 절정에 이르자 이탈리아 정부가 가족 1인의 약국과 슈퍼 방문을 제외한 모든 외출을 금지시킨 3월 14일 이후 거의 두 달만의 가족 외출이었다. 두 달간의 격리 기간 동안 가장 그리웠던 건 동네 바(이탈리아는 카페를 바라고 부른다)에서 돈을 내고 사마시는 에스프레소였다.

 

60여 일 만에 외출해 주문한 작은 잔 속의 까만 액체는 자유를 제한당한 지난 시간을 보상해주기에 충분했다. 설탕을 듬뿍 넣은 쓰고도 단 에스프레소가 목으로 넘어가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1m 간격으로 서서 투명 칸막이 너머로 받아 든 커피 한 잔이 이렇게 눈물 나는 맛이었나 싶었다.

 

이탈리아에서 커피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하나가 있다. 바로 카페 소스페소(Caffé sospeso)로 19세기 초 이탈리아의 남부 나폴리에서 시작된 일종의 커피 나눔 캠페인이다. 커피를 주문할 때 두 잔의 비용을 내서 한 잔은 마시고 남은 한 잔은 커피 한 잔 값을 내기에도 버거운 이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카페 소스페소를 남기면 누가 될지 모르는 타인이 마시게 되고 받는 사람도 누가 커피를 남겼는지 모른다.

 

이탈리아인들은 그 누구도 커피 마시는 걸 금지당해선 안된다고 여긴다. 설사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탈리아에는 ‘커피는 잔에 담긴 포옹이다’라는 말이 있다. 카페 소스페소는 타인을 위한 대표적인 연대 행위라 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에스프레소 가격은 보통 80센트에서 1유로 사이.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900원에서 1400원 사이의 금액이다. 15년 전 내가 처음 이탈리아에 발을 내디딘 해부터 지금까지 가격은 거의 변동이 없다. 이 어려운 시기에 나 자신에게 커피 한 잔을 선사해도, 혹은 누군가를 위해 카페 소스페소를 남겨두어도 부담스럽지 않을 비용이다. 여행업의 마비로 우리 가정 내 수입이 전무하다시피 하지만 나도 커피 한 잔만큼은 선뜻 사서 마시고 누군가를 위해 소스페소도 남겨둘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 더 어려운 이들을 위해 커피 한 잔을 남겨두던 이탈리아 사람들은 힘겨운 코로나 시대를 보내며 이번에도 타인을 생각했다. 커피에 이어 장보기 소스페소(spesa sospesa)를 마련한 것이다. 방식은 카페 소스페소와 비슷하다. 슈퍼에서 장을 보고 물품의 일부를 남겨두면 된다. 예를 들면 파스타면을 두 개 사서 하나는 두고 가는 것이다.

 

외출금지 조치가 시작되고 나폴리의 골목엔 바구니들이 걸리기 시작했다. 나폴리에는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바구니가 있다. 끈에 묶어 창으로 내려 보내 음식이나 물건을 전달받던 남부 사람들의 이웃 간의 정을 상징하는 바구니다.

 

그런데 코로나 시대의 바구니에는 이런 문구가 붙었다. “Chi può metta. Chi non può prenda(가능하면 놓아주세요. 아니라면 가져가세요).”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묵직한 슬픔과 무거운 불안을 감당하며 버텨가던 나날이었다. 그러나 타인에게 에스프레소 한 잔을 남겨둘 수 있는 여유와 나보다 더 가난한 이를 도우려는 마음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기에 힘겨운 그 시간들을 견딜 수 있었다. 물론 코로나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가난한 이가 더 가난한 이를 돕는 아름다운 마음들을 잊지 않으려 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커피의 맛을 묘사할 때 ‘amaro’라는 표현을 쓴다. ‘맛이 쓰다’는 뜻이지만 ‘향이 짙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지난 시간이 쓰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짙고 강하게 만들어 주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김민주(브런치 작가)

한국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온전한 한국인도 이탈리아인도 아닌 경게에 살며 <로마에서 살면 어떨 것 같아?>, <모자문답집> 두 권의 책을 썼습니다. 브런치에서 'iandos'라는 작가명으로 매주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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