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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여행자의 휴식
호숫가에서 맞이한 공백의 시간 2020년 12월호
 
호숫가에서 맞이한 공백의 시간

공백은 늘 서먹하다. 침범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서먹함이 있다. 번역을 하거나 글을 쓸 때면 필연적으로 공백과 마주해야 한다. 먼 곳에서 출발한 언어들이 내 몸을 통과해 모국의 언어로 도착할 때도, 일관성 없이 먼지처럼 떠돌던 관념들이 더듬더듬 문장으로 모일 때도 반드시 이 공백을 지나야 한다.

 

모니터 흰 화면에서 깜박이는 커서는 활자가 지나갈 때마다 얌전한 학생처럼 또박또박 옆으로 밀려나가며 공백을 지우기도 하고 때로는 오랫동안 제자리에서 깜박이기도 한다. 흥분해서 다급하게 커서를 밀쳐내며 공백을 채울 때도 있고, 앙상하고 못생긴 언어들을 꾸역꾸역 채울 때도 있다. 더러는 채워진 언어보다 공백이 나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커서가 신경질적으로 글자들을 지워 다시 공백을 만든다. 마침내 글이 끝나고 마침표를 찍고 난 후에도 저 아래 공백이 웅크리고 있다. 담지 못한 말, 활자가 되지 못한 생각들이 웅크린 공백에서 머뭇거린다. 새 번역, 새 글을 위해 새 창을 열면 다시 그 희고 아득한 공백이 나를 빤히 바라본다.

 

여행에도 공백의 순간이 있다. 투명한 하늘을 매끈하게 비행하는 매에, 머리카락 사이로 스르륵 지나가는 바람에, 풀어진 운동화 끈을 매려고 웅크리고 앉은 바위에, 잠시 기댄 늙은 나무에, 마른 풀이 타는 냄새에, 젖은 땅에서 올라오는 짙고 비릿한 흙내음에 문득 찾아오는 공백은 말갛게 어딘가를 응시하다가 홀연히 사라지곤 한다. 때론 너무 빨리 사라져 아쉬울 때도 있고 때론 너무 오래 머물러 암담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내 아쉬움이나 암담함과는 무관하게 공백은 제 시간을 텅 비우고 사라진다.

 

 

횡성호를 따라 걷는 강원도 횡성호수길 5구간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새벽이었다. 숲과 호수는 잠에서 깨지 않은 듯 흰 안개를 덮고 있었다. 짙은 안개 사이로 이따금 수초와 호수가 윤곽을 드러냈다. 백이 카메라를 꺼냈다. 나는 바위에 가만히 앉아 호수가 끝도 없이 뱉어내는 안개를 바라보았다. 걸어야겠다는 생각도, 안개를 감상해야겠다는 생각도, 생각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멍하니 호수를 응시했다.

 

부드러운 흰 수증기가 호수와 수초 사이로 어른거렸다. 희고 차가운 공백 사이로 이따금 바람이 지나갔다. 사진을 찍으러 간 백도 안개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고담한 호수에는 애쓰지 않은 쓸쓸함과 참지 않는 고요함만 가득했다. 새벽도 아침도 아닌 푸른 공백만 담겨 있었다. 나도 모르게 호흡이 깊어졌다. 호수 냄새와 마른 풀 냄새가 깊은 숨을 따라 폐를 지나 발끝으로 빠져나갔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한참을 안개 무성한 호수를 바라보았다.

 

어디에선가 배가 삐걱대는 소리와 새들의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서먹한 침묵을 갈랐다. 소리가 가른 공백 사이로 두고 온 원고가 떠올랐다. 옥천의 어느 바위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짜증이 난 커서가 활자들을 ‘다다다다’ 지워버렸고 공백이 된 원고는 입을 다문 채 제목만 덩그러니 달고 있었다. 요란한 형광색으로 표시를 한 번역 원고도 있었다. 저자의 언어가 내 몸을 통과하지 못해 어색한 번역 어투로 드문드문 이어지다가 신경질이 난 마우스가 노란색으로 휙 줄을 그은 원고였다.

 

그 번역 원고 역시 메워야 할 공백을 잔뜩 남긴 채 폴더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정확한 언어가 되지 못한 활자들이공백 너머에서 답답하게 눈치만 보고 있었다. 적막했던 호수의 공백이 무거움과 조급함에 조금씩 증발하고 있었다.

 

희미하게 동살이 잡히기 시작했다. 아침이 천천히 내려와 새벽에 스몄다. 검게 보이던 산 능선이 부드러운 황금색으로 환해졌다. 이내 낮은 구릉 위로, 나무 위로, 수초 위로 햇빛이 드리웠다. 호수에 내려앉은 빛은 소리 없이 안개를 거두기 시작했다. 안개는 꾸물거리며 수면 위를 맴돌다가 빛 속으로 투명하게 사라졌다. 어두울 때는 보이지 않던 배 한 척이 파란색 바닥을 드러냈다. 사진 작업을 갔던 백이 상기된 얼굴로 돌아왔다. 우린 보온병에서 커피를 따라 마셨다. 커피에서 올라온 흰 김이 안개에 뒤섞여 옅어진 공기 사이로 사라졌다. 입 안에 뜨거운 커피가 들어가자 세상이 더 조밀해졌다. 모든 것들이 선명한 윤곽과 색을 드러내며 현실적인 행태를 갖춰갔다. 거무스름하게 비어있던 공간에 산과 나무들이 짙은 색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호숫가 둘레로 난 숲길로 들어섰다. 머리 위로 아침 새들이 먹이를 찾느라 분주하게 지나갔다. 아침은 숲에도 깊숙하게 들어와 있었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새벽 습기가 허겁지겁 증발하면서 짙은 풀냄새를 뿌렸다. “이번 달 전기세가….” “다음 주 출장 일정이….” “어머님 독감 주사….” “마감 일정이….”

 

우린 일상에서 데려온 이야기들을 숲과 호숫가에서 나눴다. 일상의 냉장고에서 가져온 사과도 베어 물었다. 우린 너무 조밀해서 순순하게 지나가지지 않는 일상을 숲과 호수에 계속 흘렸다. 숲을 통과해 다시 호수로 이어지는 둘레길을 한 바퀴 돌고 나니 두어 시간 쯤 지나 있었다. 이제는 의심할 나위 없는 아침이었다. 세상은 분주하고 환해졌다. 부지런한 새들은 입에 벌레를 물고 있었고 파란 바닥을 한 배는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호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반짝였다. 조금 전 새벽과 아침 사이의 텅 빈 시간은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차갑고 푸른 공백은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던 것처럼.

 

 

박여진(번역가)

오랜 친구인 남편 '백'과 주말마다 길을 나서는 출판 번역가입니다. 차곡차곡 저축하듯 소소한 여행의 경험들을 쌓아 나가고 있습니다. 일상과 단절되지 않으면서도 깊이 휴식하는 주말여행의 기록을 <토닥토닥, 숲길>에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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