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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머물던 자리
나를 보던 동백의 눈동자 2021년 2월호
 
나를 보던 동백의 눈동자

코끝 찡하게 추운 날이면 마음이 먼저 찾아가는 곳이 있다. 따뜻한 아랫목도 아니고, 그리운 이가 머무는 곳도 아니다. 충남 서천 마량리 바닷가에 있는 작은 동백나무숲이다.

 

언제 처음 그 숲을 만나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10여 년 전쯤이라 어림짐작할 뿐이고 또 혼자가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한데, 누구와 동행했는지 좀처럼 기억나지 않는다. 동백나무숲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서천화력발전소와 바로 이웃해 있어서 동백나무 군락보다 화력발전소의 거대한 굴뚝이 먼저 눈에 띄었고, 어느 마을에나 있을 법한 야트막한 언덕에 가까운 아담한 규모에 큰 기대가 들지 않았다. 숲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풍경과 숲의 규모에 나는 적잖이 실망했다. 그러나 막상 동백나무숲의 내부로 향하는 계단 아래에 서자 그 실망감은 얼른 지워지고 말았다.

 

서해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닷바람 때문일까. 동백나무는 유난히 키가 작았고, 가지는 온통 뒤틀려 있었다. 오백 살이 넘은 동백나무는 80그루 남짓, 주변에는 어린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긴 세월을 견딘 검은빛의 나뭇가지는 부챗살처럼 넓게 펼쳐져 숲이 아니라 동굴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게 했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주인공을 이상한 나라로 이끄는 토끼가 나무 둥치 사이에서 삐죽 고개를 내밀 것만 같았다.

 

추운 겨울에도 대지는 봄의 씨앗을 품고 있는 것처럼 겨울의 바닷바람을 맞고 피어난 동백꽃은 꽃송이가 작은 대신 꽃잎의 붉음이 도드라졌다. 무성한 데다 광택이 나는 진녹색 이파리들이 붉은 꽃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마량리 동백나무숲의 꽃이 피는 시기는 3월 하순부터이다. 개화가 시작되면 5월 초순까지, 늦도록 꽃을 볼 수 있는데 그쯤 되면 동백(冬柏)이 아니라 춘백(春栢)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가 않다.

 

처음 숲을 찾았을 때 나는 땅에 떨어진 붉은 꽃을 잔뜩 주워서 손 위에 올려놓고 사진을 찍었다.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 숲속에서 발밑에 뒹구는 꽃 무더기를 밟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발을 내디뎠다. 꽃이 꼭 눈망울 같았다. 멀리서도 빛나는 눈동자, 무언가 할 말을 머금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

 

꽃구경 온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동백의 눈동자를 가만히 보았다. 꽃잎이 낱장으로 흩어져서 지는 꽃보다 꽃송이가 통째로 떨어지는 꽃이 더 처연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하필이면 색깔도 붉디붉어서 더 애잔한 동백꽃이었다.

 

숲의 언덕마루에는 해마다 음력 1월이 되면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祭)를 올리는 당집이 있고, 중층 누각인 동백정이 있다. 동백정에 오르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해인데도 맑은 푸른빛이 감도는 바다 위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아주 작은 섬, 오력도가 앙증맞게 놓여 있다. 등 뒤에 동백나무숲을 거느리고 동백정에서 맞이하는 일몰이 가슴속 깊은 곳까지 밀물져 스몄다.

 

그곳에 가면 비록 몸은 아직 겨울에 살고 있지만, 마음은 오백 살 넘은 나무에 붉은 꽃을 피워 올릴 봄 숲을 그리게 된다. 거문도 바닷가에 사는 소설가 한창훈은 ‘사람은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바라본 것을 닮는다. 내가 죽을 때 바다를 닮은 얼굴이 되어 있다면 좋겠으나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다’고 썼다. 생의 골목 어딘가에서, 어딘지 짐작도 하지 못하는 그 어디에서 단정하고 다정한 사람을 놓치고 홀로 나이 들어가는 나는 가끔 바닷가 작은 동백나무숲에서의 시간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내가 가장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내가 가장 닮고 싶은 것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멀리에 있는 당신에게도 묻고 싶어진다. “당신이 오래 바라보는 것 중에서 당신이 닮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

 

새해가 시작되는 지금도 나는 내가 가장 닮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당신에게 가만히 되묻고 있다.

 

김정경(시인)

201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열두 해 동안 해오던 방송작가 일을 접고, 2019년부터 전주시 ‘팔복예술공장’에서 문화기획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시집 《골목의 날씨》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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