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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즐거움을 높여주는 연필깎기 2021년 3월호
 
독서의 즐거움을 높여주는 연필깎기

지난주는 무척 바쁘게 보냈다. 화상회의 프로그램인 ‘줌(ZOOM)’을 통해 오랜만에 온라인 카피라이팅 강연을 진행했고 고정적으로 작업하는 텍스트 컨설팅 작업이 몰려 몇 날 며칠을 밤늦게까지 일했다.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을 때 나는 ‘이 일만 끝나면!’ 하면서 맡은 일을 모두 마무리하고 좋아하는 것을 누리는 모습을 상상하며 힘을 내곤 한다. 좋아하는 일이란 다름 아닌 책방에 출근해서 혼자 밀린 독서를 하는 것. 바쁠 때는 아무래도 진열된 책에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책방에는 내가 읽고 싶고 관심 가는 책들 위주로 입고를 하는데 바쁠 땐 도저히 책들을 살펴볼 여력이 나질 않는다. 그러다 일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난 어느 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책방에 출근한다. 밀린 청소와 책 진열을 하면서 오픈 준비를 마친 뒤 자리에 앉아 그간 읽고 싶었던 책을 펼친다. 손님이 오길 기다리며 독서하는 이 시간이 내겐 너무나 소중하고 행복하다.

 

한동안 소설을 못 읽어서 최근에는 제법 두꺼운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2017년 출간 당시 사 놓고 펼쳐보지 못했다가 최근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읽기 시작한 히라노 게이치로의 《마티네의 끝에서》였다.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을 좋아하는 난 이 작품 역시 영화로도, 책으로도 어서 빨리 접하고 싶었다. 영화 제목은 소설에서 조금 바뀐 <가을의 마티네>였다. 책방 이름을 ‘밑줄서점’이라 지은 이유는 내가 책을 읽을 때 유독 밑줄 긋는 걸 좋아해서인데 《마티네의 끝에서》를 읽으면서도 연필을 손에 쥐고 수시로 밑줄을 그었다. 기타리스트 정성하의 연주곡을 틀어놓고 책을 읽는데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행복한 사람인 것만 같아 책방 문을 닫아야 할 오후 5시를 향해 내달리는 시간이 아쉬울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공감 가는 문장이 보여 평소와 같이 밑줄을 그으려고 책에 연필을 갖다 댔는데 짧아진 연필심 때문에 선이 제대로 그어지지 않아 책상 한쪽에 있는 연필깎이를 꺼냈다.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의 연필깎이 윗면에는 큰 구멍 하나, 작은 구멍 하나가 뚫려 있고 큰 구멍은 안전을 위해 플라스틱 커버가 닫혀 있다. 연필이라면 커터 칼로도 얼마든지 깎을 수 있지만 굳이 연필깎이를 구입한 이유는 추억 때문이다. 손잡이를 돌려야 하는 수동 연필깎이밖에 갖고 있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난 자동 연필깎이가 그렇게 갖고 싶었다. 당시에는 연필과 샤프를 번갈아가며 쓰던 때라 꼭 필요하진 않았지만 책상 위에 최신식 자동 연필깎이 하나 놓여있다면 고단한 학창시절에 큰 즐거움이 될 것 같아 욕심이 났다.


오래 전의 바람을 어른이 되고 나서 마침내 이뤘다. 책 읽을 때 밑줄 긋는 용도로만 연필을 쓰다 보니 생각만큼 자주 사용하진 않지만 보고만 있어도 왠지 흐뭇했다. 사실 나는 칼로 연필을 깎는 게 익숙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입시미술을 공부하느라 수시로 연필을 깎아야 했기 때문이다. 데생 수업의 필수 재료인 4B 연필을 칼로 깎을 땐 숨을 한 번 고르고 차분해져야 했다. 당연히 위험한 칼을 손에 쥐고 있으니 그러했고, 연필이 예쁜 모양으로 깎여야 그림도 잘 그려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칫 심이 부러지기라도 하면 그림을 망칠 듯한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연필이나 칼에 문제가 있다며 장비 탓을 하곤 했다. 고수는 장비 탓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런 면에서 나는 고수는 못됐던 것 같다.

 

연필깎이의 작은 구멍에 뭉툭해진 연필을 넣고 연필이 깎이는 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흑심이 연필향나무와 함께 돌아가지 않으려 안간힘으로 버티는 소리가 거칠다. 이내 부드러워진 소리는 웬만큼 깎였다는 신호다.


연필을 빼내어 모양을 살펴본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번엔 연필이 책을 스치는 소리를 만끽한다. 간만의 독서가 두 배로 행복해지는 순간이다.

 

이유미

8년 넘게 총괄카피라이터로 일했던 ‘29CM’을 퇴사한 후 안양에 책방 ‘밑줄서점’을 열었습니다. 《자기만의 (책)방》 《일기를 에세이로 바꾸는 법》 등을 펴냈으며 브런치에 ‘소설로 카피 쓰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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