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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의 봄맞이 대청소 '롬떨러니따쉬' 2021년 3월호
 
헝가리의 봄맞이 대청소 '롬떨러니따쉬'

매년 봄,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 도심 곳곳은 흡사 골동품 박물관으로 변한다. 거리마다 폐품더미가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각 구역마다 정해진 날짜에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크기와 종류에 상관없이 대문 밖에 내다 버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헝가리 정부에서는 이 모든 걸 무료로 수거해 가는데, 이 날을 ‘롬떨러니따쉬(lomtalanítás)’라고 부른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쓰레기 처리의 날’ 쯤이 된다.


롬떨러니따쉬는 깨끗한 헝가리를 만들기 위해 1895년에 제정된 제도다. 벌써 126년 전부터 국가에서 시행 중이었던 제도로 이 날이야말로 온 도시가 묵은 때를 벗는 날이다. 평소 처리 비용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혹은 게으른 성향으로 인해 쓸모없는 물건들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도 이날만큼은 발 빠르게 움직인다.


헝가리에서 롬떨러니따쉬를 처음 경험했을 때, 골목 곳곳에서 무법천지와 같은 광경을 접하고 ‘다뉴브의 진주’라 일컬어지는 아름다운 도시 부다페스트가 맞나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쓰레기 더미에서도 유용한 물건들을 찾아낸다. 일부 부지런한 이들은 잘 사는 동네를 찾아가 꽤 쓸 만한 것들을 찾아내 헝가리 최저임금보다 더 큰 소득을 얻기도 한다. 또 몇몇 수집가들은 파열되거나 오래된 가전제품을 찾아 중요 부품을 채취해 재활용하기도 한다.

 

롬떨러니따쉬는 꼭 필요한 날이지만 시민들에게는 ‘견뎌야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길거리에 쌓여있는 쓰레기 더미를 마치 두더지처럼 파헤치는 무리를 눈앞에서 마주하면 충격과 함께 이게 내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인가 하는 의문이 절로 들 수밖에 없다. 이 시기에 부다페스트를 걷는 것은 ‘종말이 일어나기 직전의 모습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표현한 기사도 접했다.


그러나 나 같은 이방인들에게 롬떨러니따쉬는 새로운 부다페스트를 발견하는 날이기도 하다. 얼마 전, 귀가하는 길에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이들을 발견하고는 ‘그 날이 왔구나’ 싶었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쓰레기더미 곳곳에 눈길이 갔다. 유심히 살펴보니 버려진 물품들에서 주인의 고유한 취향과 세월들이 느껴졌다. 헝가리어로 된 마르크스의 책, 구부러진 자전거 바퀴, 해진 양복 재킷, 굽이 사라진 하이힐, 수십 년 전의 잡지 표지, 끊어진 낚싯줄, 아직은 쓸 만해 보이는 낡은 컴퓨터, 깨진 술병, 흑백 여권, 분간 안 될 정도로 해진 여행자 캐리어까지. 이것들이 헝가리의 긴 역사 같이 여겨졌다.

 

버려진 쓰레기를 보며 여권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의 설렘과 아이의 첫 자전거 시승식을 바라보며 흐뭇해했을 아빠의 미소가 그려졌다. 어느 청년의 가슴팍에서 꽃다운 청춘의 사색과 철학을 품었을 빛바랜 책, 누군가의 첫 출근을 함께했을 양복 재킷, 한 여자의 자존심이었을 하이힐의 과거가 한 편의 영화 필름처럼 스쳐갔다.


현재 헝가리에선 롬떨러니따쉬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현 자본주의 시대에 맞지 않는 관행이라 생각하며 쓰레기 처리 비용에 대해 세금을 거둬들여야 한다는 주장과 도시가 흉물스럽게 되는 이 제도를 중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롬떨러니따쉬는 단순히 쓰레기를 처리하는 날만이 아니다. 쓸모가 없어져 버려진 물건이라 할지라도 재활용되어 누군가에게는 큰 기쁨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다페스트의 귀중한 삶의 조각들과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롬떨러니따쉬는 명실상부한 ‘부다페스트의 날’이라고 지나가는 한 외국인의 목소리로 낭랑하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이경미(브런치 작가)

여행을 하다가 ‘부다페스트’와 사랑에 빠졌고, 어느덧 이곳 생활에 스며든 지 5년이 넘었습니다. 현재 통역 일을 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헝가리의 매력을 알리기 위해 헝가리와 부다페스트를 소개하는 글을 블로그와 브런치에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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