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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한 사람
초코과자와 소보루빵 2021년 3월호
 
초코과자와 소보루빵

 

지성(가명)이를 처음 만난 건 20년 전쯤이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이었던 지성이는 ADHD를 동반한 자폐 증상이 있었고, 투렛증후군도 심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자녀를 데리고 소아정신과에 온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성이 엄마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음에도 치료만큼은 정말 꾸준히 임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지성이를 다시 만났다. 우리 병원에 계속 다니고 있었지만 나와 못 만난 지 몇 년이 되던 참이었다. 예전에 아이 엄마는 ADHD치료제를 먹으면 키가 크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다며 걱정했었는데 어느덧 키 188cm의 훤칠하고 잘생긴 청년으로 성장한 아이를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지성이의 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어머 지성아, 너무 반갑다. 요즘 어떻게 지냈어?”라며 근황을 물었다. “나 회사 다녀요. 회사 다녀요.” “너 회사 다녀? 무슨 회사?” “제조업이요. 제조업.” 자신이 하는 일을 정확히 인지하고 씩씩하게 대답하며, 월급도 꼬박꼬박 받아 거의 엄마를 드리고 있는데 엄마가 저축해주셔서 돈도 많이 모았다고 자랑하는 모습에 마음이 뿌듯했다.

 

그렇게 한참 사는 이야기를 하던 지성이는 갑자기 “원장님, 그런데요, 맛있는 과자랑 빵 많이 사준다고 했죠?”라고 물었다. 가끔 아이들에게 과자나 빵을 사준다고 약속하곤 하는데 그 얘길 하는 건가 싶어서 “원장님이?”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지성이는 “아니요. 내가! 내가 원장님 맛있는 빵하고 과자 많이 사준다고 했잖아요”라고 재차 말했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뒤적뒤적 무언가를 찾더니 커다란 봉지 두 개를 내밀었다. 한 봉지에는 소보로빵이, 다른 한 봉지에는 초코과자가 가득 들어 있었다. 아이는 오늘 내가 진료를 본다는 것을 알고 직접 빵과 과자를 사 온 것이었다. “원장님, 이거먹어요. 내가 사준다고 했잖아요.”

 

들기 버거울 정도로 무거운 봉지 두 개를 양손에 받아들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빵과 과자를 전해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을 나서던 아이는 몸을 돌리더니 “원장님, 이거 내가 번 돈으로 사왔어요. 내가!”라고 말했다. “그래, 지성아. 원장님이 진짜 맛있게 잘 먹을게. 고맙다”라고 인사하는 내게 아이는 “원장님, 다음에도 또 맛있는 거 사줄게요” 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지성이가 “내가!”라고 표현할 때 난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 아이의 마음속에 그만큼 자존감이 굳건히 싹튼 것 같아 감동의 물결이 일었다. 그러고는 지성이 엄마는 아이가 이렇게 번듯이 성장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걱정과 근심으로 보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 아이가 과연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어울려 잘 살 수 있을까?’ 하며 냉가슴을 앓았을 부모의 마음이 헤아려지자 늘 그래왔듯 가슴 한편이 뭉클했다.

 

난 30년간 현장에 있으면서 부모들의 그 깊은 사랑을 여실히 느껴왔다. 얼마나 자식을 사랑하는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그 붉은 눈시울들을 보고 또 보았다. 사실 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모든 아이가 완전히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부모에게 자식이란 언제나 포기할 수 없는 존재이다. 부모의 사랑으로 지성이처럼 출발선보다 좀 더 나은 쪽에 닿게 된 아이들을 마주할 때면 항상 가슴이 벅차오른다. 자신의 역량에 맞게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모두 내 가슴에 오롯이 새겨진다.


그날 진료를 마치고 자정 넘어 귀가해 잠에 겨운 남편을 붙들고는 지성이 자랑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각종 상패와 트로피가 놓인 거실 장식장에 초코과자 한 개와 소보로빵 한 개를 보기 좋게 진열해 두었다. 최근 내가 받은 어떤 상보다 귀한 상!거실 소파에 앉아 어슴푸레 동이 터올 때까지 지성이의 선물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가슴속에 무언가가 따뜻하게 차올랐다. ‘과연 저 귀한 쿠키와 빵을 먹어도 될까?’ 한껏 올라간 입 꼬리가 한참을 내려올 줄 몰랐다.

 

오은영(의사)

최근 TV프로그램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국민 육아멘토’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입니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이자 ‘오은영 소아청소년클리닉 및 학습발달연구소’ 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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