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궁리
행복일기
샘터시조
 

 

Home > 월간샘터 > 이달의샘터
내 영혼이 머물던 자리
새벽강에는 은자가 산다 2021년 3월호
 
새벽강에는 은자가 산다

내가 사는 전주에는 날이 어두워지면 사람들이 모여드는 ‘새벽강’이 있다. 그동안 자리를 세 번 옮겨 올해로 30년째 운영 중인 술집이다. 이제 갓 성인이 된 새내기 대학생부터 백발의 원로까지 단골의 연령대도 다양하고 농부, 회사원, 사진작가, 만화가, 시인, 화가 등 손님들의 직업군도 모두 각양각색이다.


단골인지 아닌지 감별하는 방법은 주인을 부르는 호칭에 있다. 이곳에서 주인장은 ‘은자 누나’ 혹은 ‘은자 언니’로 통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주인장보다 나이가 아래면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이한테도 언니 혹은 누나라고 부르도록 정신교육을 확실히 시키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와 동갑인 그녀는 그렇게 나에게 ‘은자 언니’가 되었다.

 

내가 ‘새벽강’에 저물녘 안개처럼 흘러들게 된 것은 두 번째 새벽강 시절이었다. 당시 스물네 살이었던 내가 대학 졸업 후 직장을 구해 이 도시에 터를 잡았을 무렵이었다. 선배들은 공식적인 모임이 파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야, 새벽강으로 가자!” 하고 외쳤다.


이제는 경기도로 거처를 옮긴 정양 시인과 “은자야, 잘 살았냐? 이 가시내야!”라는 화끈한 인사로 시작하는 김용택 시인, 내 고향이기도 한 경남 하동으로 떠난 박남준 시인, 고향인 경북 예천으로 돌아간 안도현 시인 등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는 냉장고의 술이 동날 때까지 얘기하고, 노래하고, 기타치고,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빗물처럼 받아 마시며 춤판을 벌이곤 했다.

 

 박남준 시인이 은자 언니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내면 그다음에는 곧 “은자 씨, 굿 치자!” 하는 말이 나올 차례. 그가 꽹과리를 잡고, 은자 언니는 한쪽에 놓여 있던 장구를 꺼내고, 누군가는 주섬주섬 일어나 징을 손에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난리굿판은 지구인이 우주로 띄우는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격정적이었다.


'새벽강’이 새로 장소를 옮긴 지 어느덧 5년이 됐지만, 내가 사는 집에서 불과 20m 정도의 거리에 있던 두 번째 새벽강에 대한 추억이 유난히 짙다. 지금도 벽 한쪽에 걸려 있는 유대수 작가의 판화 <새벽강에는 은자隱者가 산다>에서처럼 트레이드 마크인 단발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의 은자 언니가 항상 새벽강을 지켰다. 혼자 술 마시고 싶은 날에도, 혼자 술 마시기 싫은 날에도 나는 새벽강으로 흘러갔다.

 

나는 그녀의 무심한 따뜻함이 좋았다. 언니는 앞도 뒤도 없이 “새벽강으로 와!” 하고는 전화를 끊을 때가 종종 있었다. 투덜거리며 달려가보면 겨울엔 굵은 멸치를 잔뜩 넣고 김치가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졸인 묵은지 지짐과 계란을 입혀 부쳐 낸 고소한 굴전과 뜨끈한 굴밥이 차려졌고, 봄이면 냉이 향이 군침 돌게 하는 양념간장과 구운 김, 쑥 된장국이 나를 맞아 주었다.


그러나 나만 특별대우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은자 언니는 단골이 책을 내면 열 권이든 스무 권이든 사서 손님들에게 선물했다. 또 다른 단골 누군가 전시회를 열면 그림을 사서 ‘새벽강’에 걸거나, 그녀를 언니 혹은 누나라고 부르는 숱한 동생들이 시집가고 장가들 때 혼수로 들려 보냈다.

 

봄마다 새벽강에서 열리는 화전놀이를 놓치면 못내 아쉽고 섭섭하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벚꽃차와 진달래화전을 먹는데 흰 찹쌀가루와 노란 치자가루로 색을 낸 반죽 위에 분홍색 진달래가 피어나고, 찻잔에는 벚꽃잎이 떠오른다. 꽃을 먹고 마시며 봄을 몸 안에 들이는 꽃놀이. 화전 한입 먹으면 꽃잎만 먹고 산다는 어느 신비로운 동물의 눈망울처럼 마음이 맑아지는 것 같다.


진달래화전을 먹을 생각에 봄이 가까울수록 맘이 설렌다. 그때가 되면 불쑥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박남준 시인의 <봄 편지>를 읽어주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힐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녀의 무심한 따뜻함이 좋았다. 언니는 앞도 뒤도 없이 “새벽강으로 와!” 하고는 전화를 끊을 때가 종종 있었다. 투덜거리며 달려가보면 겨울엔 굵은 멸치를 잔뜩 넣고 김치가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졸인 묵은지 지짐과 계란을 입혀 부쳐 낸 고소한 굴전과 뜨끈한 굴밥이 차려졌고, 봄이면 냉이 향이 군침 돌게 하는 양념간장과 구운 김, 쑥 된장국이 나를 맞아 주었다.


‘밤새 더듬더듬 엎드려/ 어쩌면 그렇게도 곱게 썼을까/ 아장아장 걸어 나온/ 아침 아기 이파리/ 우표도 붙이지 않고/ 나무들이 띄운/ 연둣빛 봄 편지.’

 

 

김정경(시인)

12년 동안 해오던 방송작가 일을 접고 1년 동안 도시의 골목과 골목 사이를 유랑하며 그곳에 스민 이야기를 채집하며 지냈습니다. 현재는 전주문화재단 문예진흥팀장으로 문화기획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 시집 《골목의 날씨》가 있습니다.

 

 

 
다음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나를 보던 동백의 눈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