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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기가 맺어준 인연 2021년 3월호
 
정수기가 맺어준 인연

5년 계약 정수기의 만기가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장기고객으로 유지할 것인지, 타사로 옮겨가 신규혜택을 누릴 것인지 고민스러웠다. 타사 정수기로 교체해 신규혜택을 얻는 게 이득이겠지만 선뜻 결정을 내릴 수가 없는 건 우리 집 정수기를 관리해주는 매니저님 때문이었다.

일 년 반전 새 매니저가 배정됐는데 그분 이름이 정주영이었다. 방문하기에 앞서 스케줄 조율차 연락이 왔는데, 이쪽 일이 처음인 데다 우리 집이 첫 방문집이라고 했다. 수화기 너머의 떨리는 목소리에 긴장을 풀어주고 싶어 “어머, 회장님. 앞으로 저희 집 잘 부탁드려요”라고 장난스러운 인사를 건넸다.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매니저님이 4개월에 한 번씩 우리 집을 방문할 때면 나는 꼭 커피나 차를 준비해 대접했고, 덕분에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새록새록 정을 쌓았다. 만남의 시간은 늘 짧았지만 이상하게도 여운은 길게 남았다. 작은 기쁨과 웃음이 채워지는 동안 정수기 만기가 가까워졌다. 하지만 언제나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이었다. 수개월 뒤 매니저님도 일을 그만 둘 계획이 있으셨고, 앞으로는 택배로 필터를 받아 고객 스스로가 교체하는 신 모델로 점차 교체될 거라고 했다. 정수기 필터를 교체해주시는 매니저님들도 곧 사라지겠구나 생각하니 못내 아쉬웠다.


매니저님은 본인이 근무하는 동안 해 줄 수 있는 혜택은 몽땅 주고 싶다며 선뜻 3개월 남은 교체비까지 내주시겠다고 말했다. 나에게는 꼭 그렇게 해주고 싶다는 말씀이 진심으로 와 닿았다. 새로운 정수기가 교체되면 왠지 더 애틋한 물맛이 날 것 같다. 그리고 물을 마실 때마다 매니저님이 생각나겠지?

 

 

강민지

 

두 아이의 엄마로 산책을 즐기는 45살 주부입니다. 경상도에서 서울로 이사 온 지는 10년이 되었습니다. 커피를 좋아해 바리스타 자격증을 땄는데 덕분에 남편이 희망퇴직한 뒤 단골카페에서 일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경험을 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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