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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표라 쓰지만 밀가루라 읽지는 않아요! 2021년 5월호
 
곰표라 쓰지만 밀가루라 읽지는 않아요!

글 김선미(디자인 칼럼니스트)

 

 

 

나에게 ‘곰표’는 비 오는 날, 엄마가 만들어주던 부침개로 재현된다. 엄마 옆에서 따뜻한 부침개를 날름 받아 베어 물던 그 장면에는 항상 투박한 고딕 글씨와 허여멀건 한 곰이 그려져 있는 ‘곰표’ 밀가루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2021년 현재, 곰표는 더 이상 밀가루로만 읽히지 않는다. 누군가는 패딩 점퍼를, 수제 맥주를 먼저 떠올린다.
1952년 설립된 이래 69년의 역사를 지닌 대한제분의 곰표 밀가루는 이 기업의 대표 브랜드였다. 중장년층에게는 익숙한 브랜드지만 지금의 10~20대들에게는 낯선 이름인 곰표. 매출 90% 이상이 일반 소비자가 아닌 기업 간 거래(B2B)에서 나오기 때문에 굳이 소비자와의 접점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젊은 소비자에게 잊힐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일기 시작했다. 20~39세 소비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한 설문조사 중 밀가루 하면 떠오르는 브랜드를 묻는 항목에 ‘곰표’라고 답한 사람이 5명 중 1명에 불과했다.
이 무렵 한 가지 해프닝이 벌어졌다. 2017년 한 연예인의 공항 패션 외투 사이로 곰표의 ‘표’ 자가 포착된 것. 누군가가 곰표 브랜드를 무단 도용해 만든 티셔츠였다. 하지만 대한제분 관계자는 항의 대신 새로운 협업을 제안했다. 그렇게 빅사이즈 의류를 전문으로 만드는 ‘4XR’이라는 기업을 만났고, 2018년 7월, 다섯 가지 디자인의 곰표 티셔츠가 만들어졌다.
각각 100장씩 한정판으로 제작된 이 티셔츠에 대한 소비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후 20kg 곰표 밀가루 포대에 팝콘을 가득 담아 한정 판매한 CJ CGV 왕곰표 팝콘, 뷰티 브랜드 스와니코코와 협업한 미백 곰표 쿠션, 4XR 곰표 패딩, 세븐브로이 곰표 밀맥주까지 곰표 굿즈의 완판 행진이 이어졌다.

 


곰표만의 협업 원칙

 

곰표는 2018년부터 인기를 끌던 뉴트로의 시작점을 이끌어낸 브랜드로 일컬어진다.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짧은 화제성으로 끝나는 여타 브랜드들의 컬래버레이션과 달리 유독 곰표만은 그 인기가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곰표는 철저한 원칙을 바탕으로 협업 대상을 모색한다. 밀가루를 연상시킬 수 있는가에 관한 답을 지닌 브랜드일 것. 뽀얀 밀가루가 떠오르는 미백 기능성 화장품과 치약, 설거지할 때 밀가루가 기름기를 제거해준다는 데에서 착안한 주방세제 등이 그 예다. 좋은 품질에 관한 고집도 한몫했다. 가볍고 달콤한 향으로 마니아층을 형성한 곰표 맥주는 밀맥주라는 특징까지 더해져 출시 일주일 만에 30만 개가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뉴트로 열풍은 오랫동안 쌓아온 브랜드의 상징성을 경험한 바 없는 새로운 세대들에게 강력한 인식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하지만 다양한 협업으로 인한 이미지의 과소비가 브랜드의 힘을 야금야금 깎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모든 가치 있는 것은 시간의 검증을 거치는 법. 사람 나이로 치면 칠순이 다 되어가는 곰표 브랜드는 또 어떤 시간의 검증을 거치게 될까. 올드함이 클래식함으로 바뀌는 그 경계선 위에 북극곰 한 마리가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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