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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Letter
'핸드팬'으로 극복한 폭식증 2021년 5월호
 
'핸드팬'으로 극복한 폭식증

변기에 얼굴을 박고 목구멍 깊숙이 손가락을 넣어 토할 때가 돼서야 내가 그새 또 뭘 그렇게 많이 먹었나, 후회하던 시절이 있었다. 닭발, 라면 한 그릇, 그리고 티라미수…. 그러고 보니 그날도 허기를 못 참아 라면 하나를 더 부숴 먹은 게 뒤늦게 생각난다. 배는 빵빵한데 이상하게 계속 허기가 졌다. 습관적으로 먹기를 반복하다가 살이 찔까봐 그날처럼 억지로 속을 비워내며 내 몸을 혹사시켰다.
배가 고파질까 봐 잠이나 자야겠다 싶어 이불 속으로 들어가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혼자가 되면 어김없이 눈물이 났다. 돌아가신 아빠가 생각나면서 병문안 자주 안 간 것도 후회되고,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게 죄송하고, 급기야 코로나19 때문에 요가 수업을 못하는 것도 짜증이 나 한번 터진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거울 속의 내 모습이 한심해 보였다. 벌겋게 부어 달아오른 얼굴, 눈곱이 끼고 떡진 머리카락의 내 모습이 거울에 비춰졌다. 자신의 몸을 아끼면서 살아가라고 말하는 요가강사가 그런 모습으로 있다는 게 더 창피하고 속이 상했다. ‘미쳤지. 몇 달 동안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이런다고 돌아가신 아빠가 살아오시나?’
혼자가 되면 괴로움이 나를 방에 가뒀다. 온갖 잡념에 빠져 내 몸은 점점 무기력에 잠식되어 갔다. 배는 부른데 계속 허기를 느끼는 이상증세처럼. 그래, 그쯤에서 내가 폭식증에 걸렸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실체가 없는 생각과의 대화를 거기서 멈추고 싶었다. 눈을 마주치고 귀에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누군가와 따뜻한 온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 가장 보고 싶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녕아, 뭐해?” “집에 혼자 있으니 놀러 와.”
세상 밖으로 나가라는 신호인가 싶어 놀러간 친구네 집에서 ‘핸드팬(Handpan)’이라는 악기를 처음 만났다. 타악기인 핸드팬은 UFO 또는 솥뚜껑처럼 가운데가 볼록하게 올라와 있는 금속판이다.

생긴 건 투박한데 소리는 참 맑고 투명했다. 가운데를 중심으로 움푹 파인 부분들이 여러 높낮이를 만들어 냈다. 어떻게 연주하는지 모르지만, 손가락으로 통통 튕기니 기분 좋은 소리가 몸을 감쌌다. 수족다한증이 심해 피아노를 치면 손가락이 자꾸 미끄러져 포기했었는데 핸드팬은 만져도 손에 땀이 차지 않았다.
이후 며칠 동안 나는 핸드팬 연주 영상에 푹 빠져 지냈다. 연주를 들을수록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해지는 게 느껴졌다. 저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소리로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순간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친구에게 물어 연희동에 있는 핸드팬아카데미를 찾아 연주법을 익혔다. 선생님의 조언과 달리 처음엔 손가락에 힘을 빼는 게 어려워 소리 내기가 쉽지 않았다.
“아니 아니, 손가락에 완전히 힘을 빼고 부드럽게 쳤다가 떼야 해요.”
수백 번을 반복하고서야 선생님 말처럼 내 마음을 사르르 녹이는 것 같은 아름다운 소리가 났다. 그날 이후 나는 틈만 나면 손이 가는 대로 악기를 두들겼다. 몇 시간 동안 핸드팬을 두 다리 사이에 껴 놓고 두드리고 있으면 ‘악기 하나쯤 연주할 수 있으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말이 실감났다.
핸드팬을 만난 후로 폭식증이 사라졌다. 내 삶 또한 전보다 더 풍요로워졌다. 지금은 내가 치는 핸드팬 소리가 내 자신을 위로하고 치유한다. 이 공간에 울려 퍼지는 소리,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진동, 어깨와 팔꿈치의 움직임이 내 마음에, 내 몸에 무공해 청정에너지를 불어넣어준다. 이제는 나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핸드팬으로 밝은 에너지를 나눠주고 싶다.

 

최윤

수강생들에게 내면의 편안함을 찾아주려 노력하는 2년차 요가 강사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불러왔던 폭식증을 극복하고, 호흡과 몸의 움직임에 집중해 삶을 사랑하는 법을 터득해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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