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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자라는 집
들꽃처럼 피어나는 집 2021년 5월호
 
들꽃처럼 피어나는 집

 

 

글 임형남 · 노은주(건축가) | 사진 박영채

 

 

‘들꽃처럼 피어나는 집’은 서울 성북동의 오래된 골목 안에 있는 작은 집이다. 마당에서 사람들과 집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면 아담한 정원은 어느새 점점 넓어진다. 의미를 부여하면 공간은 확장된다.

 

 

20여 년 전, 시골 국도를 지나다 길가에 동네 사람들이 편안하게 지어놓은 어느 집 한 채를 보며 길가에 피어난 건강한 들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중에 집을 지으면 ‘들꽃처럼 피어나는 집’이라 이름 붙이고 싶었는데 성북동에 지은 집에 이 이름을 붙여주었다.
성북동은 무척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원래는 서울성곽의 북쪽 언덕에 기대어 있는 서울 밖의 동네였고, 골이 깊고 물이 맑아 마치 신선이 살 것 같은 동네였다. 그러다 사람들이 소박하게 사는 동네가 먼저 들어섰고, 60년대 이후 택지 개발로 기존 동네의 맞은편 언덕에 덩치 크고 호화로운 집들이 들어서며 서울에서 손꼽히는 부촌이 형성됐다. 층위가 다른 두 동네 위로는 서울성곽이 산 능선을 타고 굼실굼실 기어가는 풍경이 펼쳐진다.
자동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골목에 지은 지 50년도 넘어 보이는 집을 어떤 사람이 우연히 사게 되었다. 주인은 이 동네를 예전부터 좋아해서 살 집을 구하러 다니다가 나무와 블록으로 된 낡은 집을 품고 있는 20평 크기의 땅을 만났다. 바늘 하나라도 떨어지면 천둥소리처럼 울릴 듯 고요한 구불구불한 동네의 골목을 사람들은 개발 가치가 없다고 하겠지만 그곳에서 일궈진 삶의 가치는 무척 높다. 골목은 하루 종일 안전하고 조용하다. 예전에는 그런 골목에서 우리의 삶이 이루어졌고, 누구나 그 기억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한다. 이 동네는 마치 퇴각신호를 접수하지 못해 어정쩡하게 남겨진 패잔병처럼 조용히 엎드려 있었다.

20평의 땅에 건축법규를 지키며 설계하다보니 한 층이 7.5평 남짓한 면적이 되어 평면적으로 펼쳐놓아야 할 여러 기능을 수직으로 쌓아올렸다. 1층에는 거실·주방·화장실, 2층에는 침실과 화장실, 다락에는 손님방과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누마루가 있었다. 땅도 20평, 집도 20평이 된 셈이다.
지금이야 ‘협소주택’이란 이름으로 작은 집들이 많이 들어서고 있지만 이 집을 지을 때는 그런 붐이 생기기 전이었다. 사실 나는 협소주택이라는 이름에 조금 저항감이 있다. 협소하다는 말이 부정적인 어감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냥 작은 집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걸까? 서울의 실핏줄 같은 골목을 유지하자면 이런 작은 집들이 골목을 지켜야 한다.
아파트에 살던 주인이 단독주택으로 가는 가장 큰 이유는 마당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좁은 골목 안에서 공사를 하다 보니 어려움이 많았고, 예산도 빠듯해 조경할 비용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한참 고민하다가 아이디어를 냈다. “들꽃을 심읍시다.” 여기서 말하는 ‘들꽃’은 이름을 몰라 잡초라 부르지만 사실은 버젓이 이름이 있는, 그야말로 들에서 자라는 자생초들이었다.

 

 

 

사람의 온기가 흐르는 마당
우리와 생각이 비슷하고 낭만이 앞서는 조경가가 흔쾌히 도와주어, 조경하는 날 까만 포트에 곱게 모셔온 40여 종의 들꽃을 펼쳐 보였다. 정말로 그는 산으로 들로 찾아다니며 싱싱하고 생명력이 좋은 들꽃을 마당 구석구석에 어울릴 종류로 캐왔다.
집 주인과 함께 모여 들꽃을 심고 대나무를 엮어 대문을 만들고 원래 있던 담장에 우리가 심은 들꽃의 위치를 표시한 ‘꽃 지도’를 그렸다. 그날은 설계와 공사를 포함해 1년이 조금 넘는 여정을 마무리하는 뒤풀이 같았다.
그래서 이 집은 마당이 네 개나 되는 집이 되었다. 앞마당은 용과 거북의 마당이다. 대문을 열고 집으로 첫발을 들이는 자리에 수도계량기가 할 수 없이 놓이게 되어 그 파란 뚜껑 위에 거북이의 등을 그려 넣었다. 그 사이 조경가는 어디선가 돌을 주워와 머리와 다리, 꼬리를 붙여줬다. 담장에 붙은 가스관은 ‘용’이라 부르기로 했다. 예로부터 집에 용과 거북을 상징하는 사물이나 글자를 두었는데, 용은 불로부터, 거북은 물로부터 집을 지켜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집과 골목 사이의 틈에는 낮은 블록 담을 쌓고 대나무를 세웠고 그 옆 벽에는 페인트로 기러기를 그렸다. 그래서 이 마당은 기러기와 대나무의 마당이다. 내가 좋아하는 《채근담》이라는 책에서 따온 것이다. 원래 문구는 ‘기러기가 겨울 연못을 지날 때 연못은 소란스럽지만 기러기가 지나가고 나면 연못은 다시 고요해지고, 바람이 대숲을 지날 때 대숲은 무척 시끄럽지만 바람이 지나고 나면 대숲은 다시 고요해진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어떤 일이 닥치면 그 일에 몰두하지만 일이 끝나고 나면 마음을 비운다’이다. 그늘진 옆 마당과 뒷마당에는 고사리와 관중 등 음지 식물들을 심었다.
그렇게 들꽃을 닮은 집과 들꽃으로 가득한 마당이 완성되었다. 주인은 봄이 되면 심지도 않은 다른 들꽃 씨앗들이 날아와 함께 피어난다며 꽃소식을 보내주곤 한다. 간혹 사람들을 데려가 집 구경을 시켜주는데, 사실 한 바퀴 돌면 10분도 안 걸릴 규모지만 사람들과 마당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보는 사람들에게 그 집은 점점 커지게 된다. 집이란 물리적 크기보다 의미의 크기가 중요하다. 의미를 부여하면 공간은 무한히 넓어진다. 들꽃처럼 피어나는 집은 작지만 건강한 들꽃과 의미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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